채 아물지 못한 발은 심장보다 높은 곳에 있어야 그나마 웃음 짓는다. 타고난 제 자리를 거부한다. 항명이요 배신이다. 발이란 놈은 타고나기를 땅을 굳건히 딛고 서서 몸뚱이를 지탱함이 본분이요, 팔자임에도 불구하고 심장보다 높은 자리를 내어놓으라 앙탈이다. 못 들은 척 외면이라도 할라치면 여지없이 저리고 쑤신 아픔을 준다. 그것도 망설이거나 주저함도 없이 '옛다 받아라!' 눈알을 부라린다. 주객이 바뀌고 하늘과 땅이 자리를 바꿨다. 익숙지 않은 일상에 낯선 얼굴들이 죽마고우 애틋했던 사이인양 고개를 내민다. 평생을 두고 만나지 말아야 할 그래서, 이름 석자 마저 알지 못하는 사이 라야 좋았을 이름을 되뇌고 만다. 엎질러진 물이니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은근슬쩍 자리 하나 내어준다. 싫더라도 결국은 알아야 할 이름이고 친하게 지내야 할 녀석이다.
심장내과며 내분비내과라는 이름의 진료실을 기웃거리고 발목이며 팔에다 혈압측정기계를 감고 얹어 검사를 한다. 일정하게 울어대는 '삐 삐 삐~' 기계음은 좀처럼 귀에 익는 소리가 아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사경을 헤매는 중환자의 머리맡에는 늘 심장박동을 보여주는 모니터와 삐 삐 삐 기분 나쁘게 울어대는 기계소리가 함께 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미 만들어진 선입견은 그게 내 삶을 건강하게 지켜주는 고마운 존재라고 해도 어쩐지 떨떠름 설익은 감처럼 떫기만 하다.
"팔자에도 없는 몸조리로 뽀드득뽀드득 살이 오르고 희멀건 피부는 아기 피부처럼 해맑다.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은 적당히 따스하고 보드랍다. 살랑거리는 바람은 또 얼마나 다정다감하고 간지러운지 모른다. 마치 연애하는 연인처럼 눈은 반짝이고 심장은 콩닥거렸다. 5월의 달콤한 꽃향기와 찰랑거리는 6월의 수면은 고요하고 정갈하다. 시간을 넘나드는 싱그러움은 청보리 찰랑거리는 어느 남도의 예쁜 섬처럼 연인들 떼 지어 걸어가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되었다."
한참을 생각해 만든 말들 바라보다가 생각했다. 남길 문장이 하나라도 있을까?
담장 너머 이면도로에는 가끔 한두 대의 자동차가 지나가고 그보다도 더 뜸하게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정오를 지난 주택가는 한가롭다 못해 까무룩 고양이처럼 졸고야 만다. 햇살도 졸고 나뭇잎도 존다. 졸다 깨다 그래도 어쩌지 못하는 지루함을 몰아내려고 피워 문 담배도 심드렁 홀로 탔다. 아파트 작은 숲길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 잡생각으로 시간을 죽여야만 한다는 것은 일종의 고문이기도 하다. 말도 안 되는 문장을 쓰고 지웠다. 지워 비워진 자리에 다시 빼곡히 말들을 채워 넣었다가 지우길 몇 번. 그나마 정오의 그림자 걸음을 서둘러 오후의 저기 어디쯤 그림자를 드리웠다는 것에 안도하는 날들. 이러다 젖을 잘 돌게 한다는 우족이라도 한 짝 사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야만 이 지루한 몸조리가 끝날 것만 같다.
아, 차라리 친해져야 할 이름이나 불러 봄이 좋을지도 모른다. 투제오, 휴마로그, 테넬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