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자리가 뒤숭숭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른 새벽에 깨었다. 휴대폰을 켜고 시간을 확인한 남자는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벗어났다. 애매한 시간이기는 했지만 다시 잠을 청하기에는 새벽 푸른 공기가 좋다고 해야 할까? 어쩐지 남몰래 즐기는 나만의 시간, 살금살금 까치발로 걸어 발소리를 죽이고, 담장에 매미처럼 달라붙어서는 숨소리도 죽여야만 했던, 그래서 결국 훔쳐보고야 말았던, 담장 넘어 우물가에는 두레박 찰랑거리는 물소리에 여름밤이 빛났다. 하얀 달빛에 달빛보다 더 뽀얗던 순이의 속살이 목화솜처럼 빛난다고 생각했다. 심장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었고, 호흡은 또 얼마나 거칠던지 마치 대장간의 풀무인 양 푸우 푸 요란을 떨었다.
발가벗고 물장구치던 소년과 소녀는 어느 순간부터 눈길조차 마주치지 못하게 되었다. 소년은 거뭇거뭇 수염이 돋았고 목소리는 가래라도 낀 것처럼 괄괄해졌다. 바람에 팔랑이는 치맛자락만 보아도 얼굴은 빨개지고 심장은 뛰었다. 어디 소년만 그랬을까. 계집에는 까맣던 피부가 윤이 나고 젖가슴은 제법 봉긋하게 솟아서 처녀의 몸매를 흉내 내고 있었다. 둘은 어느새 거부할 수 없는 성장통을 앓고 있었다. 2차 성징에 울그락 붉으락 해가 뜨고 달이 졌다. 담장 넘어의 계집애가 달빛으로 곱던 날들이었다.
"풋! 맞아, 그런 날도 있었지? 순이는 잘 살고 있으려나 몰라?"
땅뙈기 하나 없던 남자의 아버지는 품팔이라도 해서 먹고살겠노라 고향을 등지고 서울 어디쯤으로 이사를 했다. 소년과 소녀의 이별은 전적으로 소년의 아버지 탓이었다.
국을 끓이고 시골에서 보내온 김치도 썰어 접시에 담으며 남자는 싱겁게 웃었다. 아침을 이렇듯 부지런 떨며 준비한다는 것도 우스웠고 지난 시간을 더듬거린다는 것도 우습다고 생각했다. 자기 몸뚱이만큼이나 긴 더듬이를 더듬더듬 휘젓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마치 자기 자신이 볏잎에 매달린 메뚜기가 된 것만 같았다. 시원한 맥주에 바삭한 메뚜기 한 마리, 우스꽝스러웠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난 있잖아 정말 그러고 싶어!"
남자가 그녀와 커피를 마시다가 말을 꺼냈다. '만약'이란 전제를 깔았으니 그럴 수 없다는 말일 터였다. 정말 그랬으면 한다는 꿈이고, 소망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그물코처럼 엮인 수많은 인연이 있겠지만 사랑이란 인연만큼은 맨 처음으로 너를 만났으면 좋겠어. 네게도 내가 그랬으면 좋겠고. 그래서 들불처럼 뜨겁게 너만을 사랑했으면 좋겠어. 첫사랑도 그렇고 끝사랑도 너였으면 좋겠어. 너라면 그래. 너라면 정말 인생을 다해 사랑할 수 있을 거 같아."
남자는 애들 엄마와 이별을 했을 때 더는 사랑이란 말을 떠올리지 않았다. 그저 바람처럼 떠돌 수 있는 지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던 남자가 '만약이지만 하는 꿈'을 오물거렸다. 소의 되새김처럼 평화로웠다. 느릿느릿한 말들이 오드득 소리도 고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