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눈을 뜬 건 막 여섯 시를 지나서였다. 조그만 창을 비집고 들어온 여명은 방을 희뿌옇게 밝혔다. 사실 칠흑 같은 어둠이 가득한 방이라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두 눈을 감았다 하더라도 장님 코끼리 만지기보다 더 정확한 몸짓으로 구석구석을 살필 수 있는, 너무도 익숙한 아니, 익숙함을 넘어 이미 한 몸이 되어버린 공간이었다. 콧구멍 만한 원룸이고 보면 익숙하다 말하는 것도 어쩌면 웃기는 얘기 일지도 모른다.
먼 길을 돌아 남자가 집으로 돌아온 건 스무날 하고도 이틀이 지나서였다. 이를 앙다물고서 매제의 어깨에 기대어 계단을 내려갔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 3층이란 곳이 이렇듯 생과 사를 나눌 높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누가 꿈엔 들 그렇게 생각할까? 돌쟁이 외축 비축 우스꽝스러워도 눈 깜짝할 사이면 오갈 높이였다. 하나 둘 셋.... 소리 내어 세어 보아도 그렇고, 후닥닥 걸음을 떼면 마치 시공간을 넘나드는 축지법이라도 시전 하듯 1층이요, 3층이었을 높이를 새어 나오는 신음소리를 장단 삼아야만 했었다. 불과 22일 전의 일이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깃발을 나부끼며 목청을 돋워도 통일의 길은 요원했고, 봄이면 산천을 뒤덮고야 마는 연분홍 진달래꽃에도 이념의 탈을 덧씌워야만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는 배반의 세월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세월이라는 이름의 시간도 어지간히 무심한 놈이라서 강물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저 흐를 뿐이다. 흐름에 있어 멈춤이나 망설임도 없다. 너는 짖어라!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 말을 남기고 70여 년을 묵묵부답 흘렀다. 절망의 벽은 높고 아득했다. 백척간두, 바람이 사나웠을 때 남자의 걸음을 막아선 계단은 요원하기만 한 통일의 길처럼 멀고도 험악한 길이었다.
습관적이고 익숙한 동작으로 빨간 버튼을 눌렀다. 버튼을 누르는 순간 조막손으로 남은 어둠은 달아날 것이고 눅진하게 붙어있던 적막강산에 돌돌돌 소리도 곱게 냇물이 흘렀다. 혼밥과 친해져야 하는 때부터 생긴 습관이었다. 혼자가 아니구나 하는 느낌을 받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도란도란 두런두런 텔레비전이 수다를 떨 때 남자는 작은 냄비 하나를 찾아들고 있었다. 싱크대 수납장을 뒤지던 남자의 눈에 미역 봉지가 들어왔다.
"순이야, 오늘 아침은 미역국이야. 어때? 괜찮지?"
'완도 실미역'이란 글씨가 인쇄되어 있었다. 냉장고를 뒤지고 싱크대를 뒤적였지만 마늘도 없고 양파 한 톨이 없다. 하긴, 뭔가 있을 거야! 생각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유전자의 고리에 새겨진 몸짓인 양 남자는 뒤적이고 있었다.
주거니 받거니 순이와 수다를 떨며 남자가 아침을 준비하고 있을 때 사위는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아, 혹여나 오해할까 싶어 중언하자면 '순이'는 남자가 붙여준 텔레비전의 이름이다.
아침이라니.... 혼자가 되고 난 이후에 아침을 먹은 기억이 없었다. 올빼미 같은 생활습관이 늦은 잠을 부르기도 했고, 징검다리 건너듯 아침을 건너뛰는 것도 오랜 습관이기도 했다. 육체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어서 굳이 아침은 불필요하다고. 그 생각이 오늘의 몸뚱이를 만들었구나 남자는 생각했다. 늘그막에 후회를 부르는 습관이었겠지. 어차피 버스는 떠났고 엎질러진 물이다. 이제라도 꼬박꼬박 챙겨야지 하면서 달걀 하나 탁~소리도 경쾌하게 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