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령 굽이길

굽이굽이 멀기도 하지

by 이봄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고양이 세수로 눈곱을 겨우 떼고 주섬주섬 옷을 걸쳤다. 거실 등 조차 켜지 않은 발걸음은 조심스럽고 그림자 같았다. 스멀스멀 거리를 메우는 안개처럼 조용했고 배회하는 길양이의 걸음처럼 가벼웠다. 아직은 더 밤의 영역에서 단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었다. 날궂이 하듯 웽가당 뎅가당 시끄럽고 싶지 않았기에 도둑고양이 꼬리 감추듯 남자는 집을 빠져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방 안에는 토끼 두 마리와 여우 한 마리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칭얼대며 새벽을 깨우던 토끼와 토끼의 성화에 못 이겨 포대기 들쳐 메고서 좁아터진 거실을 서성였을, 여우꼬리가 미동도 없이 늘어져 있다. 피곤한 새벽, 꼬치 틀 듯 파고든 잠자리는 고요하게 유지돼야만 했다. 폭풍전야의 고요가 반갑고 아쉬울 터여서 등 조차 켜지 못했다. 밭에 김을 맬래? 아니면 애를 볼래? 물으면 백이면 백 이구동성으로 밭을 맬래요! 했다는 그 육아와의 전쟁으로 집은 짙은 포연에 휩싸이기 일수였다. 그러다 잠시 찾아온 휴전의 달콤함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총성이 멈췄다. 토끼는 하얀 기저귀를 깃대에 매달았고 여우는 낡은 남자의 러닝셔츠를 펄럭였다. 그래, 그래야지. 허리가 뻐근토록 자거라. 중얼중얼 중의 고기라도 먹은 듯 중얼거리는 걸음이 가벼웠다.

사실, 남자의 이른 출근도 토끼와 관련된 일 때문이었다. 남자는 시골 출신이라서 때 되면 귀향버스에 몸을 싣고 한 시간 반 남짓을 가야만 했는데 지난 추석 귀향길에서 사단이 벌어졌다.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에서 애는 어르고 달래도 울음을 멈추지 않았고 여기저기서 불만 섞인 말들은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뭐야? 저렇게 애를 울리려면 자가용을 타던지. 시끄러워 죽겠네"

"거기 뭐 전세라도 냈어요? 애 좀 달래 봐요.... 돌아버리겠네 진짜...."

그래, 미안하다 미안해! 누가 울리고 싶어 이러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나도 죽겠다, 죽겠어.... 날은 덥고 정수리에선 굴뚝처럼 뿌연 연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 내가 다음에 버스를 타면 성을 바꾼다. 성을 바꿔! 그때 남자는 다짐을 했고 새벽 이른 출근은 면허증을 따기 위해 운전면허학원을 가는 중이었다.

삐익 삑 밥솥이 울었다. 백미와 보리쌀을 섞어 지은 밥은 고슬고슬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익었다. 배곯던 시절엔 쇠고기 뭇국에 흰쌀밥이 남이나 북이나 소원이었던 때도 있었다는데 찬밥 신세로 전락한 것도 오래였다. 백미 여섯에 보리쌀 넷, 무늬만 잡곡밥이 아니다. 백 세 시대에 백세를 향한 몸부림은 아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이 그의 밥상을 바꿔버렸다. 밀가루 음식을 멀리하고 달달구리 애들 입맛은 버리라고 했다. 지엄한 의사의 경고이고 보면 따를 수밖에....

지금처럼 밥 짓는 냄새로 골목이 떠들썩할 때 남자는 골목에 세워진 차 한 대와 마주했다. 방금 배송되어 온 차는 어두운 골목에서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고 곁에는 흐뭇한 미소로 반기는 여우와 토끼들이 남자를 맞이했다. 아, 그래. 드디어 우리도 콩나물시루에서 해방이로구나. 남자도 환하게 웃었다.

퇴근 무렵 남자를 찾는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남자의 여우였다.

"언제 퇴근해? 다른 데로 세지 말고 바로 집으로 와! 보여줄 게 있어. 알았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여우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들떠있었다. 무슨 일이지?, 하면서도 워낙 들뜬 목소리라 뭔가 좋은 일이 있겠구나 했는데, 그게 바로 자동차였다. 더는 버스를 전세 내지 않아도 될 자동차가 거기에 있었다. 카탈로그 한 장 보지도 못한 차였다. 아니지, 차를 산다는 귀띔도 듣지 못했는데 덜컥 차를 샀다. 어지간히 급한 성미의 여우가 '나 잘했지?그치?' 대답을 다그치듯 웃고 있었다. 그래, 까짓 거 뭐면 어떠냐?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숟가락을 내려놓고서 남자는 인생 첫 주유를 위해 주유소를 찾았다. 주유구가 어느 쪽에 있는지 주유구 레버는 어디에 붙었는지 헤매며 주유를 마친 남자는 휘발유 냄새가 참 좋다고 생각했다. 이왕 나온 거 동네나 한 바퀴 돌아볼까 생각한 남자는 차선도 제대로 넘나들지 못했던 두 시간여의 주행으로 도로연수를 끝냈다. 지금이야 도로주행이 시험과목에 포함돼 있지만 그때만 해도 면허시험장 담장 밖으로 나올 일은 없었다.

이튿날 야근으로 퇴근이 늦었던 남자가 밥상을 물리며

"우리 바다 보러 갈래? 일출도 보고...."

"일출을 보려면 새벽엔 떠나야 하는데 괜찮겠어?"

도로연수는 완벽(?)했고 고속도로는 한산할 터였다.

"그럼 괜찮고 말고. 조심해서 운전하면 돼. 걱정 마 가자."

그렇게 토끼 두 마리와 여우 한 마리 그리고 늑대 한 마리가 새벽 한계령을 넘었다. 구불구불 꼬불꼬불 식은땀이 등줄기를 적셨지만 무모함은 청춘의 특권이라고 우기며 아흔아홉 굽이를 돌았다. 무모하고 미련한 여행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미친놈이었다 백 번을 뜯어말릴 일이었지만 그때는 차고 넘치는 자신감에 새벽을 달릴 뿐이었다. 굽이굽이 인생길에 무모함이 만든 추억으로 남았다. 모골이 송연한 무모함의 추억이다.

산은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위험하고 힘들다고 그때는 오르막의 굽이 길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반환점을 넘어선 남자가 한계령 새벽길을 마주하고 섰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널 나이라서 더는 무모함도, 쇠를 녹일 열정도 없는데 길은 여전히 굽이굽이 펼쳐져 있고 게다가 내리막 길이다. 남자는 탈이 난 몸뚱이로 길 위에 있다. 토끼도 여우도 떠난 굴에서 밥 짓는 냄새만 구수하게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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