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 참 거시기하네. 웃자니 민망하고 울자니 난감해서 남자는 두 팔에 얼굴을 묻었다. 남자는 가끔 진열대에 늘어 선 음료며 과자에 시선을 빼앗기다가도 온통 설탕 범벅인 것들 뿐이라서 화들짝놀라 시선을 거두고야 마는데, 유비무환이라고 만약을 위해 사탕 몇 알이나 초콜릿 하나쯤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좋다고 했다. 혈액에 녹아든 당이 높아 약을 먹거나 주사제를 맞다가도 저혈당이 찾아오면 응급처치로 당을 올리란다. 그래야만 한단다.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지 모르는 광대가 철퍼덕 땅바닥에 주저앉아 고깔을 벗고, 널뛰기하는 혈당을 바라보던 남자는 쓴웃음을 짓고야 말았다. 모순이고 아이러니다. 동전의 양면이 피카소의 자화상처럼 한 화면에 펼쳐졌다.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얇아지는 지갑을 바라보며 치 쉬고 내리 쉬던 한숨 끝에 '꼬르륵꼬르륵' 위장이 반기를 들었다. 뱃속에 무슨 거지라도 들어앉았는지, 때는 또 어찌나 정확한지, 아우성치는 배꼽시계의 꼴을 보노라면 굳이 시계를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비어 가는 고간에는 쌓이느니 한숨인데 식욕은 날을 더해 좋아지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으라고 고간이 비어 가면 식욕도 그에 걸맞게 아니, 최소한 그런 척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도무지 눈에 뵈는 게 없는지 철부지 떼쓰듯 막무가내다. 말린다고 멈출 발버둥이 아니다. 머리 따로 몸 따로 각자도생의 길이라도 가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몸뚱이는 배고프다 발버둥 치고 남자는 어찌 살까? 발버둥 쳐야만 했다.
아침이면 밥상을 차리듯 탁자 위에 몇몇의 말을 늘어놓았다. 햇살, 맑은 바람, 따뜻한 아궁이, 부드러운 미소, 내일, 그리고 또 내일來日....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밝고 긍정적인 말들 되뇌다 보면 말의 힘에 기대어 오늘을 건널 수 있겠다 싶었다. 감정도 전염이 된다고 스스로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우울하고 암울한 말들에 빠지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그 말들에 매몰되고야 말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웃기고 재미있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야만 웃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드디어 저놈이 미쳤구나!, 하는 말을 듣는다 해도 남자는 억지웃음을 웃었다.
남자라고 왜 모를까? 몇 푼 남았던 은행 잔고는 이미 바닥을 드러냈고 몸뚱이는 고장이 나서 일을 구할 수도 없다. 사면초가, 길은 어둡고 사방이 낭떠러지다. 안개는 자욱했고 돌부리는 지천에 널려있다. 그렇지만 가던 길을 멈출 수는 없었다. 가다 넘어지더라도, 절뚝거리는 걸음 지팡이에 기대서라도 가야만 하지 않겠는가. 탁자에 늘어놓고 다독거리는 말들은 그에게 지팡이 같은 말들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듯 말은 숨구멍 하나를 만들고 어깻죽지 빠져나올 탈출구를 만들기도 할 터였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라고 만 날 징징거리며 울까? 지나는 사람 다짜고짜 붙들고서 죽는소리로 하루를 열고 하루를 닫을 수는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심정으로 내일을 꿈꿨다. 내일에서 빌어오는 게 꿈이라고 했다. 오늘, 푸른 하늘 바라보며 '그래, 그래도 죽으라는 법만 있는 건 아닐 거야. 현실이 아무리 죽어라, 죽어라 한다고 해도 빠져나갈 구멍 하나는 분명 있을 거야!' 숨구멍을 찾듯 남자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비록 억지웃음이었지만 답답했던 가슴이 뚫리는 것만 같았다.
내일에서 꾸어온 꿈 동아줄처럼 붙들고서 남자는 꿈을 꿨다. 남자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없기도 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만이라도 최선을 다하자 하는 마음이기도 했다. 어차피 고민으로 밤을 지새운다 해서 해결될 일이라면 몇 날 며칠이고 밤을 지새우겠지만 고민은 고민으로 불면을 부를 뿐이었다.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자 웅얼거렸다. 꼬인 실타래 푸는 것이 쉽지만은 않겠지만 풀다 풀다가 정 안 되면 가위로 자르게 되더라도 오늘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오리무중, 안개 자욱해도 길은 거기에 있었고 남자는 오늘도 그 길을 걷는다. 최선을 다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