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 좀 뽑아요

굶겨놓고 이렇게 마구 뽑으면 어떡해?

by 이봄

핑곗거리는 늘 차고 넘쳤다. 망우리 공동묘지의 숱한 무덤들 중에도 핑계 없는 무덤이 하나 없다지 않은가. 그랬다. 비가 오면 비가 와서, 눈이 내리면 눈이 내려서.... 바삐 파닥이던 참새는 늘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했다. 날굳이를 하듯 퇴근길엔 늘 어깨가 뻐근하고 몸은 천 근으로 무겁기만 했다. 탁배기 한 잔에 마른 목을 축이면 농자천하지대본, 농부들의 어깨춤이 절로 흥겨웠고, 마른 멸치대가리 고깔 씌우듯 고추장에 거꾸로 찍으면 어부들의 비릿함이 소주잔에서 일렁였다. 마치, 푸른 파도가 치고 갈매기 몇 마리 자맥질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만 같았다. 때로는 숨비소리 휘익 휙 불며 나타난 해녀가 해삼 하나 불쑥 내밀며 그랬던 것 같다.

"이봐요? 거기요? 백 날 천 날 청춘이 아니라오. 뭐든 적당해야지 그러다 경을 칠 수도 있어요"

"아, 네. 그래야죠...."

뻘쭘해진 남자의 꼬리 내린 말이 쥐구멍을 찾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해가 빌딩 사이로 기울면 언제 그랬냐는 듯 숙취는 사라지고 술은 고팠다. 오죽하면 새 대가리란 말이 있을까. 어제의 해는 어제로 졌고 오늘의 해는 오늘 떠오를 뿐이다. 참새의 어제는 까마득한 옛날이야기요, 전설의 고향쯤 되었다. 부어라? 마셔라! 한 순배 술잔이 돌면 근심 걱정 찌뿌듯한 몸뚱이는 나풀나풀 나비처럼 가볍고 꽃잎처럼 경쾌했다. 빙글빙글 왈츠라도 춰야 할 것 같은 밤이 황홀하게 저물고 있었다.

* 2020년 7월 13일 오전 내분비내과

* 12시간 공복 유지할 것(금식)- 물은 마셔도 됨.

* 2층 내과 채혈실(오전 중 방문 채혈할 것)


등등.... 주의사항, 검사에 필요한 것들과 예약 확인을 위한 전화번호가 인쇄된 종이를 들고 남자가 중얼거렸다.

"등등.... 등.... 그래? 그랬구나. 저녁 이후엔 아무것도 먹으면 안 된단 말이지? 굶으라면 굶어야지 . 내가 뭔 힘이 있겠냐."

시간 간격을 두고 몇 번의 채혈을 할 거라는 설명을 들은 터라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눈 질끈 감으면 따끔하고 말 아픔이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는 주사는 은근히 피하고 싶은 고통이었다. 그러니까 남자는 혈당 검사를 위해 하루 손끝을 네 번 따야만 했고, 인슐린 주사제를 네 대 맞아야만 했다. 워낙 얇은 바늘이라서 말 그대로 따끔한 정도였지만 벌써 한 달여를 뾰족한 바늘로 찌르고 있다. 그것도 하루에 총 여덟 번 씩이나.... 이슬비에 속옷이 젖는다고 뾰족한 바늘만 생각해도 미간은 찌푸려지고 심장 뛰었다. 머뭇머뭇 쉽사리 찌르지 못했다. 무슨 사내놈이 그까짓 머리카락 같은 바늘에 떨고 난리냐?, 하겠지만 반복되는 고통은 자기 방어라고 해야 할까? 자기도 모르게 긴장을 하게 되고 회피하고만 싶은 마음이 들게 마련이었다. 오죽하면 혈관이 숨는다고 하지 않던가. 매 번 뾰족한 바늘에 찔린 바늘은 더 깊은 곳으로 숨어든다고.... 참 신기한 일이야! 남자가 중얼거렸다.

"본인 확인 좀 할게요. 성함하고 주민등록 번호요?"

간호사는 생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우선 공복에서 채혈을 할 거고요 이후에 설탕물을 섭취하고 30분 간격으로 네 번 더 채혈을 할 거예요. 아셨죠?"

이런 젠장할.... 드디어 시작이구나.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고 팔뚝에 힘이 들어갔다.

"아, 네. 그렇군요. 채혈 중에도 물은 마셔도 되죠?"

뻔한 질문을 툭 던지고 시선을 피했을 때 간호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요. 간혹 설탕물을 드시고 토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땐 바로 말씀을 해 주셔야 해요"

"그럼 어떻게 되죠? 채혈을 못하나요?"

은근히 채혈을 중단한다는 대답을 기대하던 남자에게 간호사는 말했다.

"아니요, 다시 마셔야 해서요"

하하하.... 뭐라고? 토한 걸 다시 마셔야 한다고? 정말 젠장이네 이거.... 남자의 유치한 기대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따끔할 거예요. 조금만 참으세요. 주먹은 꼭 쥐시고요. 말처럼 따끔했다. 바늘에 찔린 팔이 따끔했고 찔려야만 하는 현실이 따가웠다. 채혈실을 가득 채우고서도 모자라 대기표를 뽑아 든 사람들이 콕콕 바늘로 찌르듯 따끔거렸다.


"이봐요? 거기요? 백 날 천 날 청춘이 아니라오. 뭐든 적당해야지 그러다 경을 칠 수도 있어요"

만약에 그때 불쑥 나타난 해녀가 멱살잡이라도 하면서 술잔을 빼앗았으면 어땠을까? 해녀 아주머니가 어째 원망스럽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던 남자가 피식 쓴웃음을 웃었다. 정말 그런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면 남자는 말을 들었을까?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오드득 오드득 해삼을 안주 삼아 마시는 술은 캬아~소리도 맑고 고울 터였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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