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팝나무 푸른 잎에 베짱이 한 마리 유유자적 앉아 더듬이 한 쌍 낭창거리며 쓰르락 사르락 노래를 불렀다.
"봄날의 땀방울은 소금 한 됫박 짜기도 하더니만, 가을이라 누런 들은 풍년가로 흥겹구나...."
흥에 겨운 발장단은 엉덩이가 들썩하고, 뭉게 둥게 어깨춤은 흰구름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하는 짓이 어찌나 곱던지 걸음을 멈추고야 말았다. 아예 그것도 모자라 턱을 괴고 앉았다. 어디 한 번 보자꾸나! 작심하고 앉은 남자는 베짱이를 요목조목 뜯어보았다. 버들가지 낭창거리듯 길게 늘어진 더듬이며 이슬 같은 눈이 반짝였다. 저 앙증맞은 입으론 뭘 먹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제 몸뚱이 보다도 크고 튼실한 뒷다리는 나무 하나쯤은 넉히 뛰어넘겠다 싶었다. 초록으로 치장한 갑주 밑에는 아마도 초록빛 피가 파도처럼 온몸을 돌고 있겠지? 킁킁 냄새라도 맡는다면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날까? 아니면 푸릇한 풀냄새가 날까? 엉뚱한 생각도 떠올렸다. 날개 집에 고이 접어 둔 날개는 오래전 대나무 우산살에 파란 비닐을 씌운 나무 우산처럼 투명하게 바스락거렸다. 귀뚜라미와 수놓던 가을밤의 소나타는 두 날개 비벼 만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랬던가. 은하수 맑은 물은 바람에 찰랑거렸고 베짱이의 노래는 투명하게 허공을 날았다. 쓰르락 사르락 까만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은 수만 년 이어온 베짱이의 노래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뚫어져라 뜯어보는 남자의 시선을 의식했을까? 베짱이는 짐짓 모른 척 시선을 피하면서 턱을 추켜올렸다. 거들먹거리는 모양이라니.... 배를 뒤집어 아양을 떠는 고양이의 그것처럼 보드랍고 귀여웠다. 이내 짧은 앞다리를 바삐 놀려 더듬이를 다듬더니 사르락 날개를 폈다. 이팝나무에 내려앉던 햇살이 베짱이의 날개에 스몄다. 투명한 얼음에 맺힌 햇살이었다.
"거기 아저씨? 나는 이만 실례할게요!"
쓰르락 사르락 날개소리가 풍경처럼 울렸다. 으스대는 모양이 결코 밉지 않았다.
의도치 않은 백수의 나날이 해처럼 뜨고 달처럼 이지러졌다. 시간은 또 얼마나 빠른지 손톱 달 하나 떠오르는가 싶더니만 이내 배를 불리고 몸짓을 키웠다. 반달에서 보름달이 찰나 지간이었고 다시 손톱 달로 저물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뒤도 돌아보지 않듯 먼지 풀썩이며 떠난 시간도 다르지 않았다. 딱히 할 것도 없는 남자의 시간은 황금으로 빛나지 않았다. 오히려 잉여의 시간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었다. 먹고 자고, 다시 부스스 일어나 밥을 짓는 일상의 반복이라면 변명의 여지없이 잉여의 시간이 맞았다. 평소 시간을 금처럼 썼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달을 넘기는 시간은 너무도 아까웠다. 겨우 한 개비 꺼내 핀 담배를 통째로 잃어버렸을 때 느끼게 되는 아까움이라고 해도 좋겠다. 눈만 감으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아까움이다. 그냥 흘려보낼 수만은 없었다.
주섬주섬 종이를 꺼내고 연필도 몇 자루 탁자에 올려놓았다. 일기를 쓰듯 하루에 몇 문장의 글이라도 쓰자 마음먹었다. 그저 일상의 소소함이라고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거창한 영웅전이나 눈을 뗄 수 없는 이야기야 난세의 영웅이 할 일이요, 이야기꾼의 몫이니 감히 기웃거릴 일이 없었다. 남자야 그저 죽어나가는 시간에 손톱만큼의 의미라도 부여할 수만 있다면 충분했다. 어설프고 한심한 글이라면 또 어떠랴. 읽어주고 귀 기울일 사람 없으면 또 어떠랴 생각했다. 쌓이고 남는 것이 시간뿐인 백수가 심심풀이 땅콩을 아작아작 씹는다 생각하면 될 터였다.
그렇게 날마다 이야기 하나씩 만들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말들이 백지를 메우고 때로는 화선지 한 자락을 차지하고 앉았다. 무료하고 지루하던 날들은 어느 먼 나라의 신화처럼 아득했고, 끼니를 챙겨야 하는 사이사이로 이야기를 쓴다는 건 저잣거리처럼 부산스럽고 바빴다. 남자는 가끔 아무도 없는 방에서 턱을 한껏 추켜세우고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뜯어봤다. 희끗희끗 귀밑거리가 샌 남자가 거기에 있었지만 나름 봐 줄만 하다고 생각했다. 잘 깎인 연필이 종이 위에서 쓰르락 사르락 움직였다. 말들은 한데 어울려 이야기가 됐고 밤이면 밤마다 베짱이는 탁자에서 날개를 펼쳤다. 쓰르락 사르락 쓰르락 사르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