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야만 합니다

말이 폭탄으로 터졌습니다

by 이봄

고속도로에 막 올라섰을 때 폭탄이 떨어졌다. 앞서가던 차들이 일제히 속도를 줄이더니 비상등을 켜기 시작했고 후미등 노란 불빛과 비상등이 뒤섞여 깜박이더니 여기저기 경적이 울었다.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갑작스레 날아든 폭탄은 순식간에 도로를 혼란에 빠트렸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틈도 없이 이어진 공격으로 고속도로는 이미 제 기능을 잃고 휘청였다. 차선은 지워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차량엔 토끼눈이 된 사람들이 벌건 눈으로 사태 파악에 나섰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터져버린 폭탄의 잔해들 뿐이었다. 와이퍼는 미친 듯이 오가며 잔해를 치웠댔지만 그때뿐이다. 천정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은 이미 와이퍼의 한계를 넘은 지 오래였다.

뉴스에서나 들었을 법한 비가 쏟아졌다. 국지성 집중호우라고 했던가? 소나기라는 말로 치부하기엔, 그러니까 대기가 불안정해서 지엽적으로 내리는 잠깐의 비라고 하기엔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물폭탄이다. 말 그대로 지나가는 비가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계획되고 준비된, 그래서 도저히 그 포화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도 없는 전장의 폭탄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물꼬 터진 봇물처럼 쏟아진 빗물이 도로를 점령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오빠, 참 희한하지? 우리가 병원에만 가면 비가 내리네"

"그러게, 나도 방금 그 생각을 했는데 정말 그러네. 오늘은 소나기가 잠깐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들이붓고...."

한 달여 전에 병원 문을 나서던 날 말고는 매 번 비가 내렸다. 뭔 놈의 조홧속인지 모를 일이다. 거 참.... 남자는 말을 하다 말고 마른침을 삼켰다.

"술 담배 둘 다 하시나요?"

의사가 물었을 때

"아, 네...."

남자의 대답은 짧고 간결했다. 어떤 식으로든 덧붙일 말도 없었고 숙제 검사받는 애들처럼 이러니 저러니 핑계를 대고 싶지도 않았다.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는 질문이 왔고 그에 걸맞은 뻔한 대답이 갔다.

"아시죠? 이젠 예전처럼 둘 다 즐기실 수 없단 걸요. 술도 줄이셔야 하고, 담배는 이참에 끊으셔야 합니다"

젊은 의사는 크지 않은 목소리로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렇지만 하지 말아야 할 것과 조심해야 하는 것들을 설명할 때에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고 말투는 단호했다. 어떤 타협의 말도 사양하겠다는 의지가 묻어있었다.

"네, 네...."

설명이 이어질 때마다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더니만 마침내 웅얼웅얼 옹알이하듯 알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추임새를 놓듯 뱉는 것인지 구별조차 어려웠다. 남자라고 모르지 않았다. 백해무익하다는 담배는 특히나 혈관질환에는 쥐약임을 세상이 다 아는 상식인데, '아, 그렇군요?' 딴청을 피울 수도 없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했다. 오래된 벗을 친구라고 했는데 남자는 이제 그 친구와 이별을 준비해야만 한다. 건강을 위해 하는 것이라곤 '그래, 건강해야지!' 하는 입에 발린 말 뿐이었지만 건강하고 싶었다. 좋아하는 친구 몇몇 곁에 두고서 오래오래 행복하고 싶었다.

이별은 슬프고 절절할 터였다. 함께 한 시간이 몇 해며 함께 한 일들이 또한 얼마던가? 켜켜이 쌓인 추억만 하더라도 트럭으로 몇 대는 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봄소풍 때였다. 턱수염이 제법 굵어지고 까맸을 때 친구 녀석이 불쑥 담배 한 개비 내밀며 그랬다.

"야, 우리 한 번 피워볼래? 이게 있지 사람을 뿅 가게 한대. 어때? 피워보자!"

뭐든 처음은 황홀했다던가. 하늘은 노랗고 몸뚱이는 못해도 소주 두어 병을 원샷한 기분이었다. 봄날의 꿈처럼 떠나보내야 하는데 남자는 자신이 없었다. 떠나보냄이 아쉬워서가 아니라 의지박약 한 자신을 알기에 쉽사리 선언하지 못했다. 작심삼일도 못 될 것만 같아서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머뭇거릴 뿐이다.

"이젠 끊으셔야 합니다!"

가슴에 날아드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폭탄처럼 터졌다. 물폭탄에 말폭탄이 뒤섞여 터졌다. 선혈은 낭자했고 나부끼느니 투항의 깃발이었다. 백기 투항! 전제조건도 내걸지 못하는 무조건적인 투항이다.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더는 버틸 방법도 없고 명분도 없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상처투성이의 몸뚱이뿐이었다. 남자가 포연 자욱한 길 위에 서서 하얀 깃발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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