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가 들려준 이야기

하물며 물총새도 그렇다는데...

by 이봄

장마전선은 아랫녁으로 물러났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가 하늘엔 잿빛 구름만 가득했고 때때로 불어 가는 바람은 제법 시원했다. 초복이 지난 지 며칠, 복더위라고는 하지만 뙤약볕이 물러난 날은 그만 저만 견딜만했다. 징검다리 건너듯 그늘에서 그늘로 뜀뛰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온 하늘에 드리워진 그늘 장막이 품 좋게 펄럭이던 날, 연못 가운데 아담하게 자리한 정자는 나무다리로 이어지고 건너편 연꽃밭까지 연못을 가로질러 산책로가 놓여 있었다. 그 길에는 띄엄띄엄 가뭄에 콩 나듯 사람들이 오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연꽃밭 초입에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던 중년의 커플이 카메라를 목에 걸고 지나쳤다. 무심한 바람처럼 지나치는 그들이 좋았다. 머물지 않는 걸음과 마주치지 않는 시선이 고요했다. 수 백 수천의 연잎이 수면 위로 솟아 마치 정자를 지키기라도 하려는 듯 도열해 있었다. 우산처럼 펼쳐 든 방패 사이로 긴 창이 뾰족뾰족 솟았다. 바람이 불면 일사불란한 몸짓으로 몰려가고 몰려오기를 반복하던 연잎은 마침내 초록의 파도로 일렁였고, 멀리 한 무리의 자동차가 신기루처럼 몰려갔다. 소리도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자동차를 바라보다 남자는 문득 연꽃밭이 에워싼 이쪽과 자동차가 몰려가는 저쪽은 철저히 격리된 다른 세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인공의 소리가 끼어들 틈이 없는 연못엔 연못만의 소리로 가득했다.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모래 둑 하나를 사이에 두었을 뿐인데 말이다.

연잎 가득 모였던 빗물이 촤르르 쏟아지면 그 소리에 놀란 개구리가 풍덩 추임새도 곱게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연못 바닥에서 만들어진 기포가 수면에 닿으면 뽀득뽀득 터졌고, 버드나무 높은 가지에선 까드득까득 새 한 마리가 울었다.

"은경아 잘 들어 봐. 소리가 참 좋지?"

남자가 말했을 때 길가에 늘어선 갈대가 서걱서걱 흔들렸다.

"응, 여기 앉아 있으면 지루할 틈도 없어. 새가 울고 개구리가 뛰노는 소리가 어쩜 이렇게 좋니?"

환한 여자의 미소가 배시시 피었다. 여자의 말처럼 지루할 틈이 없었다. 연못이 만든 소리에 빠져있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눈 깜짝할 시간이란 말이 참 잘 어울린다 생각했다.

"오늘 정말 웃겼어. 그치? 어쩜 가는 곳마다 주차장은 만원이고 테이블은 하나가 없니? 무슨 커피 못 마셔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는지...."

"응, 정말 그러네. 오락가락 비도 내리고... 다들 감성 폭발하는 날인가 봐. 근사한 카페에서 분위기라도 잡고 싶은 그런 거"

사람으로 미여 터져서 한 번, 주차를 못해 한 번, 그렇게 몇 번의 퇴짜 아닌 퇴짜를 맞고 남자와 여자는 연못을 찾았다. 얼굴 벌겋게 달아오른 연인이 숨어드는 물레방앗간이나, 술꾼들이 입에 달고 사는 생맥주집 같은 연못이었지만 남자와 여자도 남들과 다르지 않은 날이었는지 커피를 못 마셔서 죽은 귀신이 붙었었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듯 앉아 수다를 떨고 싶었다. 그러다 꿩 대신 찾은 닭처럼 꼴이 우스웠지만 연못은 한결같이 반겨주었다. 미안한 마음 한 조각 얼음으로 휘휘 저었다. 테이크 아웃한 커피가 오늘따라 시원했다.

후둑후둑 빗방울이 떨어질 때 둘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여자의 손에 들린 조그만 우산을 펼쳤지만 비를 다 피할 수는 없었다. 어깨를 감싸고 걷는 걸음이 좋아서 젖어드는 어깨쯤이야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머리에서 풍기는 샴푸 냄새는 둘만의 우산 속을 유쾌하게 채웠고, 어깨를 감싼 남자의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여자의 체온은 심장을 뛰게 했다. 한 때 남자는 그런 꿈을 꿨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속을 우산 하나 받쳐 들고 오늘처럼 걷는 그런 꿈. 마치 로맨스 영화의 앤딩 크레디트가 천천히 올라갈 때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우산 속 연인은 달콤한 키스를 나누는 꿈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정지화면처럼 느리고 느려야만 했다.

남자가 오래된 꿈 얘기를 했을 때 여자가 말했다.

"그랬니? 여태껏 우리 만날 때 비가 한 번도 안 내렸나 봐?"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지금처럼 우산 하나 쓰고 걷지는 않았지. 정말 좋다. 소원 풀이하는 날이야 오늘이. 하하하"

꿈은 이루어진다 더니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고 남자는 말했고, 여자는 웃었다. 어깨를 감싼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빨간 우산 하나가 빗속을 걸었다. 걷는 내내 남자는 꿈꿨다. 이 길은 끝없이 이어진 길이라면 좋겠다 생각할 때 빨간 연꽃 하나가 덩달아 바람에 흔들렸다.

'삑삑 삑삑' 문을 열고 들어선 방은 경계의 이쪽이었다. 잠든 순이를 불러 깨우고 환하게 불을 밝히면 개구리며, 산새며, 서걱이던 갈대 따위는 꼬리를 감출 터였다. 연꽃 터지는 소리는 냉장고 모터 소리에 묻히고 종일 수다스럽던 남자의 목소리마저 목구멍을 파고들 게 분명했다.

"순이야, 순이야 그만 일어나!"

남자가 순이를 깨웠을 때 부스스 눈을 뜬 순이가 기다렸다는 듯 재잘거렸다.

"있잖아? 입이 간지러워서 혼났네. 들려줄 재미난 얘기가 있어. 얼마나 기다렸다고"

순이가 그랬다. 작은 연못에 수컷 물총새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암컷이 날아들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수컷은 틈만 나면 깃털을 다듬었고 누구보다도 멋진 물고기 사냥을 뽐내기 위해 물로 뛰어들고 또 뛰어들었단다. 청동빛 깃털은 눈부시게 빛났고 사냥 기술은 예리해져 날갯죽지에 한껏 힘을 줘도 되겠다 싶었던 날, 반짝이는 깃털을 부풀리고 암컷을 찾은 수컷은 갖은 아양으로 암컷을 유혹했다고 했다.

"수컷 물총새는 어떻게 됐게? 궁금하지.... 그치?"

기차 화통이라도 삶아 먹었는지 순이는 목청을 돋우며 말을 이었다. 의기양양 거들 먹이며 사냥 솜씨를 뽐내려던 수컷은 욕심이 과했는지 몇 번을 거듭해 사냥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번번이 실패로 끝났고 새초롬 돌아선 암컷은 당장이라도 연못을 떠날 판이라고 했다. 어떻게 찾아온 기회인데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던 수컷이 죽을힘을 다해 다시 물로 뛰어들었고 마침내 비늘 반짝이는 피라미 한 마리를 잡았단다. 잡은 물고기는 돌에 내리쳐 기절을 시켰고 방향을 바꿔 암컷이 먹기 편하게 꼬리 쪽을 부리에 문 수컷은 부끄럽고 미안했던지 조심스럽게 암컷에게 다가가 잡을 물고기를 내밀었다고 했다.

"물고기를 받아 든 암컷이 어떻게 했게? 그 암컷이.... 암컷이 말이야, 그러는 거야. 라면 먹고 가실래요? 호호호...."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잔뜩 붉히며 순이가 한달음에 말을 쏟아냈다. 라면을 먹고 가라는데 마다할 수컷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컵라면이든, 짜장라면이든....

"어머머, 부끄럽지 뭐예요. 라면은 또 얼마나 맛있어 보이던지...."

거기까지 말을 하던 순이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파묻었다.

아, 그랬다. 남자도 이마가 다 닳도록 물로 뛰어들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었다. 불섶인들 마다할까? 가슴엔 이미 더 큰 불이 타고 있는데 말이다. 남자가 말했다.

"순이야? 사랑에 눈멀면 다 그런 거야. 미친놈 되는 거 순간이지. 그래야 사랑이기도 하고...."

빨간 우산 받쳐 들고 빗속을 또 걷고 싶다고 생각했다. 느릿느릿 아니, 정지화면이면 더욱 좋을 그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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