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곱씹고 있었다. 두서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상념은 좀처럼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때때로 울컥 치미는 서글픔으로 심장을 뛰게 했다. 가슴 밑바닥에 차곡차곡 쌓였던 감정들이 초겨울 서릿발처럼 생각들을 들고 일어서서는 가슴을 휘젓기 일쑤였다. 나이를 먹으면 새벽잠이 줄어든다고는 했지만, 한 번 깬 잠은 도무지 돌아올 기미가 없어서, 벌써 며칠째 새벽을 뜬눈으로 보내고 있었다. 밑도 끝도 없는 생각의 바다에 빠져 한참을 허우적거려야 비로소 뿌옇게 하늘이 열렸고, 두 눈은 벌겋게 핏발이 맺혔다. 먼동이 트려는지 열린 창으로 새벽이 희뿌연 얼굴로 스며들었을 때, 남자는 쾡한 눈으로 볼펜을 찾아들었다. 뭐라도 쓰고 싶었다. 비몽사몽 혼미한 정신에다 어지러운 마음이니 횡설수설할 게 분명했지만, 그렇더라도 억지춘향으로 잠을 청하기도 싫었고, 무엇보다 설피 떠오른 감정이라도 남겨두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새벽 이른 바람은 맑았고 창가를 서성이는 어둠도 탁하지 않았지만, 청하지도 않은 손님맞이로 부산을 떨어야만 하는 남자는, 태풍이 몰려간 골짜기에 사납게 몰아치는 흙탕물을 고스란히 뒤집어써야만 했다.
생각해 봤어. 벌써 소식을 끊은 지도 두 달이 넘은 거 같고, 그만큼 많은 시간을 생각했다고 봐도 될 거야. 그렇더라. 하루에도 수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내려놓곤 했어.
"잘 지내지? 나도 그냥저냥 지내고 있어."
문자를 작성하다가 지우고 그러다가 다시 똑같은 말들을 쓰게 되더라고. 그렇지만 거기까지가 전부였지. 네게 보낼 수가 없더라고. 그냥 가볍게 안부를 묻는 건데 뭐 어때? 설마 하니 이런 안부도 물으면 안 될 건 없잖아? 술에 취해 혼잣말을 주고받듯이 묻기도 하고, 대답을 했지만 결국은 보내지 못했어. 용기가 없어서 그럴까? 잘 모르겠다. 용기가 없다는 게 맞을 듯싶네. 자존심을 내세운다 거나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용기의 부재가 맞을 거야. 내세울 자존심이란 것도 사실 시렁의 곶감 빼먹듯 야금야금 빼먹어서 남은 것도 없지만, 우리 사이에 무슨 자존심을 내세우겠어?
"우리 각자의 삶에 충실하자. 더는 연락하지 않을 거야. 그런 거 있잖아? 가끔 돌아 돌아 들리는 소식으로 안부를 대신하는 거. 그랬으면 좋겠다. 잘 지내. 알았지? 갑작스럽게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해"
마지막은 언제나 먹먹하고 쓸쓸한 게 맞다지만,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은 너의 문자엔 그렁그렁 눈물이 가득했던 거 같아. 차마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말들이 한 됫박 눈물을 매달고 있었지. 아니다. 읽는 내가 그러고 있었던 거야.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 기억할 수도 없었어. 그냥 배가 고프니까 밥을 먹고, 잠이 오니까 잠도 잤어.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 겨우 움직이는 시간이었다고 해야겠지. 세상은 나와 상관없이 잘도 돌아가고, 홀로 남겨진 나만 건전지가 빠진 시계처럼 멈추고야 말았어. 벽의 한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지만, 벽시계는 그저 단순히 인테리어 소품에 지나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모든 게 멈춰버렸어. 시간도 멈췄고 생각도 늘 그 언저리를 떠나지 못했어. 날마다 같은 생각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잠이 들었지.꿈을 꾸고는 했어. 꿈에서도 끝없는 길을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걷고는 했는데, 그러다가 길가에 철퍼덕 주저앉아 너를 떠올렸어. 너무나 보고 싶어서 너 사는 아파트가 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라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었고 말이야. 그러다 잠에서 깨면 그리움은 몇 곱절 늘어나 어깨를 짓눌렀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리움이란 말은 멍에가 되어 매달리고 말더라고.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벗게 되려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멍에겠지.
"시간이 약이야. 참고 견디다 보면 다 잊히기도 하고 살게도 되더라. 산 사람은 또 살게 마련인 거야"
위로하고 다독일 때면 늘 등장하는 말이야. 그래, 그럴 수도 있고, 세상을 먼저 산 사람들이 체득한 결론이니까 분명 맞는 말일 수도 있을 거야. 의심의 여지없이 모범답안이겠지만 세상 모든 일엔 예외라는 게 존재하기도 해. 꼭 내가 거기에 들어맞는 예외인지는 나도 확답을 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마음은 그래. 웃기지? 시작은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끝은 그렇지가 않더라. 분명 다 내 마음에서 비롯됐지만 어깃장을 놓고, 떼를 쓰고야 마는 게 마음이란 놈이야. 이젠 정말 누가 주인인지도 모르겠어. 내 안에 깃든 마음이지만 뜻대로 할 수도 없더라고. 곱씹어 몇 날 며칠을 생각해 봤는데 나는 널 잊고 살 자신이 없어. 정말이야.
책상에 코를 박고 얼마 동안을 있었는지 동이 트고 있었다. 남자는 한동안 미동도 없이 편지를 써 내려가더니만, 벌떡 고개를 쳐들고 창가를 바라보더니만 뜬금없이 편지를 찢어버렸다. 역시나 보낼 수 없는 편지글이었다. 한참을 매달려 쓴 편지였지만 차마 보낼 수가 없었나 보다. 어쩌면 구구절절 그리움을 쏟아낸 편지라서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그리움에 눈물을 흘리고 멍한 가슴으로 먼 산을 바라보기 일쑤였지만, 소식도 주지 않는 그에게 가슴 밑바닥에 고인 그리움만큼은 보여주고 싶지 않을 수도 있었다. 자존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민낯을 드러내는 일종의 부끄러움이었겠지. 편지는 응석받이의 응석이 몇 줄 있을 터였고, 어리광을 부리는 글들도 그만큼 있을 게 뻔했다. 누구 하나 남자의 응석을 받아줄 일이 없었다. 혼자 떨어져 사는 세월이 오래되다 보니 곁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말을 나누고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그녀가 거의 유일한 존재였다. 가끔은 나이도 까맣게 잊고 칭얼대며 품을 파고들고 싶었다. 때로는 떼쓰며 어리광도 부리고 싶었다. 젖먹이 아이처럼 품에 안겨 쌔근거리며 잠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그만큼 남자는 따뜻한 체온이 그리웠고, 포근한 시선에 굶주렸었다. 떼를 쓴다고 다 들어줄 만큼 어리지도 않았고, 예쁘지도 않은 나이에 어쩐지 그녀라면 품어주고 안아줄 것만 같아서 치기 어린 마음을 먹었는지 모르겠다. 노병의 훈장처럼 이마엔 주름이 깊게 패었고, 머리에는 희끗희끗 서리가 내려앉았지만 그녀 앞에만 서면 남자는 어린애가 되고 말았다. 아니, 아이가 되고 싶었지만 세월은 깊었고, 홀로 떠안은 말들은 짙었다. 숲의 그림자가 짙어지면 이내 가을이고 겨울이 되듯이, 남자의 세월도 거기 어디쯤을 서성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커피집 문을 밀고 들어가며 남자는 한껏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두 달 남짓 시간이 흘렀지만 정갈하게 꾸며진 내부의 모습이며, 외부에 놓여 있는 온갖 화분들은 그대로였다. 한 뼘쯤 키를 키운 화초들이 꽃을 피우기도 했고, 앙증맞은 열매를 매달고 있었다. 반가운 풍경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오셨네요."
웃음이 얌전한 여주인이 반색하며 웃을 때 남자가 주문을 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랑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시럽은 살짝만 넣어주시고요."
주문하는 목소리는 가볍고 경쾌했다. 마치 파란 하늘을 나는 잠자리의 날갯짓을 닮았다. 투명하고 얇은 날개는 가을볕을 한 번 걸러내 더욱 투명하게 만들었다. 물비늘 반짝이듯 말이 반짝였고, 입가엔 숨기지 못한 미소가 삐죽삐죽 삐져나왔다.
"오늘은 같이 오셨나 봐요? 호호호"
귀엣말로 속삭이듯 주인은 그녀의 안부를 반색하며 물었다.
"네, 오늘은 시간이 맞아서 같이 왔어요. 정말 오랜만이죠?"
묻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 모두 얼굴 가득 환한 미소가 번졌다.
혼자 몇 번의 걸음을 했었다. 혼자 커피를 주문하고 익숙한 자리에 앉아 그를 떠올리기도 했고, 무료함을 달래려 글을 쓰기도 했다. 미리 다듬어놓은 캘리그래피를 사진에 넣으며 시간을 조물딱거렸지만, 혼자 맞이하고 보내는 시간은 지루하고 답답했다. 방에 앉아 있으나 밖에 나와 추억이 가득한 커피집의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있으나 매한가지였다. 그러다 끝내 그리움이 목울대까지 차오르면, 같이 했던 장소를 찾는 것으로 울적함을 달래고는 했다. 양산만 한 연잎이 파도처럼 몰려가는 연밭이며, 길게 늘어진 수양버들이 바람에 미역을 감는 연못을 찾고는 했지만, 그것 역시 시큰한 마음을 어루만지지는 못했다. 꿰매지 못하고 흐르는 피를 지혈하는데 급급한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잠시의 억누름이라고 해야 할까? 찢어져 벌어진 상처는 아프지만 아파도 꿰매야만 봉합이 되고 새살이 돋게 마련이었지만 도통 상처를 꿰맬 수가 없었다. 이러다 좋아지겠지? 막연한 기대만 할 뿐 어떻게 해야 할지 길을 알지 못했다. 잊히지 않는 추억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꾸역꾸역 젖은 운동화가 질척이듯 솟아났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리운 마음은 더해만 갔고, 뻥 뚫린 가슴엔 황소바람이 불었다. 허허로운 시간이었다. 먹어도 먹어도 달랠 수 없는 허기가 바람으로 몰려오고 몰려갔다.
"정말 오랜만이다. 그렇지?"
순이가 말을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게. 여름이 막 시작될 때쯤 오고 그게 마지막이었으니까.... 그새 여름이 다 지나버렸어. 부는 바람이 다르잖아? 벌써...."
잘 다듬어진 잔디밭에 가을이 내려앉고 있었고, 능소화 굵은 덩굴엔 잠자리도 몇 마리 앉아 졸고 있었다.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낯빛을 바꿨다. 논밭으로 이어지는 마을길엔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그늘을 찾아 햇볕을 가리면 절로 콧노래라도 흥얼거려야만 할 것 같았다. 잔뜩 끈적이며 들러붙던 바람은 뽀송하게 말라있었다. 잔디밭 옆에 마련된 야외 테이블에는 유쾌한 바람과 햇살이 오누이처럼 붙어 앉아 도란도란 말을 나누고 있었다. 방해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남자는 저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여가며 그늘이 좋은 자리에 앉았다. 초록의 그늘 밑에 빨간 차양이 묘한 어울림을 만들고 있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늘 혼자 외로워하셨었는데...."
햇살이 반쯤 걸터앉은 야외 테이블에 주문한 커피를 내려놓으며 주인이 말을 건넸다. 그가 웃었다. 열 마디의 말보다 더 반가운 안부였다.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했던 커피집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으레 쪼르르 달려와 커피를 홀짝거리며 수다를 떨던 곳이었다. 그것도 지루하다 싶으면 커피집에서 멀지 않은 연못가를 거닐었다. 잘 정비된 산책로는 연못 한가운데에 작은 정자도 하나 지어져 있었다. 여름이면 굵은 소나기를 피하기도 했고, 뙤약볕을 가리기도 했었다. 정자에 앉아 지나가는 바람이며 껑충 키가 큰 갈대에 앉아 목청을 높이던 개개비를 보고 있으면 지루할 틈도 없었다. 무엇에 놀랐는지 개구리 한 마리 첨벙 소리를 내며 연못으로 뛰어들면 도미노가 쓰러지듯 여기저기서 개구리들이 연신 물로 뛰어들었다. 첨벙첨벙 멀고 가까운 것에 따라 소리는 높낮이를 달리해서 실로폰 연주를 하듯 듣는 귀가 호강스러웠다. 한낮의 연못은 시간을 거꾸로 돌려 마치 수수단을 움집 삼아 소나기를 피하던 계집애와 사내 녀석이 된 듯한 추억을 만들기도 했다. 어쩐지 달큼한 칡꽃 향이 나는 것만 같았다.
"백신은 언제 맞아? 예약은 했지?"
바람이 안부를 전하지 못했구나 싶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는 했지만, 귀가 막히고 눈은 멀었는지도 모른다. 날마다, 시간마다 가슴에 담고 머리에 떠올리던 숱한 말들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듣도 보도 못했으니 전해줄 말도 없었을 테고,전해줄 안부도 없었을 터였다. 궁금했을 터였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어디 무 자르듯 잘라내어 여기까지 만이야 하고 선을 그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돌아 돌아 들리는 소식으로 안부를 대신하자던 그에게서 날아든 문자였다.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바이러스라서 궁금함을 더했겠지? 남자도 궁금했었다. 다만, 잘 지내고 있겠지? 단지, 속으로만 묻고 궁금해했을 뿐이다.
"응, 며칠 전에 맞았어. 걱정했던 거보다 부작용도 없었고.... 잘 지냈니? 넌 어땠어?"
"나도 괜찮았어. 첫날만 좀 욱신거리다 말았네."
그랬구나? 잘 지내고 있었다니 참 다행이다 싶었고, 너도 조금은 보고 싶은 구석이 있었구나 생각했다. 우물우물 오물오물 말들이 앞다퉈 머리를 내밀었다. 서로를 등 떠밀며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좀처럼 말을 잇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안부를 들었으니 이제 됐다 말문을 닫을 수는 없었다. 네가 보고 싶어서 난 미칠 지경이야 말을 하고 싶었다. 이어지다 끊어지다 머뭇거리던 말끝에 참고 참았던 말을 겨우 끄집어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순이야? 내일은 뭐해? 우리 점심 먹을래?"
"어머? 얘는.... 우리 헤어진 거야. 헤어진 거 알고는 있는 거야?ㅎㅎ"
"그래, 우리 헤어진 거 맞아! 그러니까 같이 밥 먹자. 응? 순이야?"
빨대로 얼음을 휘휘 휘젓자 달그락달그락 유리잔에 얼음이 부딪쳤다. 얼음 부딪히는 소리가 오늘따라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에 남자는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끄적였다.
"뭐야? 기껏 헤어진 사람한테 보자고 조르더니 핸드폰만 보는 거야? 나 그러면 집에 간다. 갈까?"
"아냐?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봐"
말을 끊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남자가 이내 그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거기엔 한 줄의 말이 쓰여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