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만 남아

by 이봄

"빨갛게 여물었던 가을이 퇴색되듯 기억은 결국 추억으로 남게 되는 거야"

결국 스산한 바람이 거리를 점령했을 때, 마음속에도 휑하니 바람이 불고 주머니 속 구겨진 편지 만지작거리고 말아. 몇 번이고 꺼내 읽고 또 읽은 편지는 토씨 하나하나 가슴에 새겼지만 눈에 아른거려 결국은 또 꺼내 보게 되는 거. 좀처럼 놓지 못하는 기억들은 옹이처럼 굳은살로 남게 되는 거겠지. 어쩌겠어? 쇠처럼 단단한 옹이가 박히고 시도 때도 없이 빠져드는 추억이 되는 걸 막을 도리가 없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앓게 되는 통과의례라고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할 터야. 굳이 마다하고 손사래 친다고 해서 멀찍이 돌아갈 녀석도 아니고, 어쩌면 젖어 들어 행복한 시간이 더 많을지도 모르는 거야. 가슴 뭉클하게 스며들 추억조차 없다면 이 계절이 얼마나 삭막하고 황량할까 싶기도 해. 다만, 그런 거야. 아직은 추억의 갈피로 넣고 싶지 않은 것들마저 억지로 지난 것들로 만들어야만 하는 일들이 아플 뿐이야. 서둘러 겨울채비를 한다면 모를까, 애써 이별을 서두를 필요는 없잖아.

굳이 오늘 이별을 서두르지 않아도 이별은 오게 마련이거든. 천 년을 사는 나무도 비바람에 꺾이거나 고사하고야 마는 날이 오게 마련인데, 하물며 허덕허덕 백 년에 매달리는 인생이야 떠들어 봐야 입만 아프지 뭐. 부는 바람에 덜컹거리는 문틀처럼 관절마다 우두득 요란을 떠는 세월을 살고 있으니 지난 기억들만 고개를 쳐드는 요즘이야. 그래서 그런가 생전 꾸지도 않던 꿈들은 새벽까지 이어져 마음을 어지럽히기도 해. 참 이상하다 싶어. 꿈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떠난 사람들이고, 그래도 함께 커피도 마시고 통화도 하는 사람들은 코빼기도 볼 수가 없더라고. 왜 그런지 이유도 모르겠어....


엊그제는 이사를 준비한다는 말에 심장이 멎는 줄만 알았어. 당장 그런다는 것도 아니었지만 까마득히 먼 얘기도 아니라서 생각만으로도 심장은 요동치고 마음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지. 하긴, 해외로 이민을 떠나는 것도 아니고, 어디든 마음만 있으면 못 갈 것도 아닌데 이사라는 말이 꼭 이별인 것만 같은 건 방정맞은 생각일까? 지척에 두고도 건너지 못하는 강이 있기도 하고, 바다를 건너 만나게도 되는 게 인연이고 보면 기우에 지나지 않을 걱정일지도 모르겠어. 아무튼 눈을 떴을 때부터 만지작거리던 편지 한 장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요즘이야. 다 늙어서 그렇겠지만 알알이 추억만 쌓이네. 오늘도 뒤돌아서면 그렇게 지난 추억이 될 터여서 더욱 그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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