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내내

by 이봄


못해도 여섯 해는 더 됐을 사진이다. 기억이 희미함을 감안해도 그렇다. 나날이 총기가 사라지는 요즘이고 보면 날짜의 정확을 말하기엔 무리가 따르는 사진임에는 틀림이 없다. 계기를 삼고 싶었고 끊어냄을 얘기하고 싶었던 사진이다. 돌이켜 생각해도 딱히 좋은 기억은 아니다. 진작에 맞이한 이별을 치근덕대던 시간이 있었고, 찌질한 내가 거기에 있었다. 찬바람만 휑하니 부는 거리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내가 서성이고 있었다. 매몰차게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훌훌 털어내고 돌아서야만 했다. 길은 사방으로 이어져 있었으므로 어떤 방향이 되었든 걸음을 옮기는 것이 그나마 초라함을 덜어내는 거였다.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없던 것처럼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는 게 어려웠을 뿐이다. 머리로야 백 번 천 번을 다짐도 하고 혈서라도 썼겠지만, 어찌 된 일인지 가슴은 늘 제자리를 서성이고 있었다. 끊어내고 싶었다.


있는지도 몰랐던 사진 한 장을 태웠다. 지갑 깊은 곳에 간직하던 사진이 세월에 묻혔을 때, 그저 아련한 추억이라 치부했었다. 상처에는 새살이 돋았고 가슴에는 봄바람이 분다고만 생각했다. 햇살은 눈부셨고 바람은 향기로웠다. 날마다 지친 몸뚱이로 찾아드는 둥지는 혼자였지만 그럭저럭 아늑하고 따뜻했다. 그러다 문득문득 감기처럼 가슴앓이를 해야만 했다. 미련이니 어쩌니 하는 문제는 아니었다. 되새김질을 하듯 곱씹게 되는 기억이 아리고 따가웠을 뿐이다. 관계 회복이니 하는 따위의 마음과는 무관했지만 이따금씩 가슴을 헤집는 것만은 피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것도 토굴 속에 들어앉은 내가 부르고야 마는 주사 같은 앓이였겠지만 말이다. 퇴근 전부터 취기가 올랐던 날로 기억된다. 삽질로 손이 부르트는 일이라서 진통제처럼 술이 따라붙었다. 그날도 어지간히 취해 돌아온 방에는 쓸쓸함이 먼저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찾아드는 불청객이었다.

서랍에 있던 지갑을 찾아내어 사진을 꺼내고 이내 불을 붙였다. 불도 켜지 않은 방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있었고, 어둠을 배경으로 불꽃은 환하게 타올랐다. 속내도 모르고 타는 불꽃은 따뜻했다. 주황빛 너울거리는 불꽃을 따라 온기가 전해지고 싸늘했던 공기는 적당히 데워지고 있었다. 인생의 한 마디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진작에 끊어내야만 했던 마디였다. 잘린 줄기는 새롭게 움을 틔울 게 분명했다. 잘라내지 않으면 새로운 움을 기대할 수가 없는 거였다. 돌아선 뒤춤에 덕지덕지 미련을 매달고 뒤뚱거릴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매달린 미련이야 빈 깡통처럼 요란을 떨고 귀만 따갑게 아우성칠 터였다. 어르고 달랜다고 해서 해결될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 거였다.


핸드폰 속 사진첩을 뒤적이다가 지난 기억을 떠올리고야 말았다. 왜 아직도 이 사진이 남아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간직해서 유쾌한 사진은 분명 아니었고, 좋은 추억도 아니어서 의아한 남김이었다. 왜 그랬을까? 기억을 거슬러 오르다 보니 좋든, 싫든, 쓰고, 남기는 버릇이 거기에 있었다. 주절주절 포도알처럼 말들이 쌓였다. 시큼하고 달큼한 것들이 한데 뒤섞여 또 다른 맛으로 혀를 자극하듯 말들이 만드는 기억도 다르지 않았다. 분명 아린 기억이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맞닥뜨리게 되는 기억은 이미 발효되고, 정제된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을 못 뱉는다고 기억도 마찬가지다. 너는 웃는 얼굴이면 안 되는 거야! 알았니? 야단을 치기에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해서 넌 어쩌면 웃는 얼굴이 이렇게 환하니? 반겨주기에도 애매한 것들이 때로는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그래서 굽이굽이 돌아드는 인생이 견딜만하다 싶기도 하다. 뭐가 됐든 골머리를 싸매고 종일, 내내 가슴앓이를 할 이유는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편두통만 부르는 고민이라면 어디 멀찍이 던져버려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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