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運命...

by 이봄

그녀가 묻더이다.

"요즘은 어떻게 사는 거야?"

"응, 그게.... 어떻게 살긴 여기저기 손 벌려 겨우 사는 거지 뭐...."

대답은 궁색하고 마음은 부끄러웠습니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현실이 그런 것을 어쩌겠어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거나 감출 수도 없었습니다. 뻔한 오늘이고 투명한 어항 속에서 입만 뻐끔거리는 금붕어일 뿐입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겨우 뱉어내는 대답이 좋을 리도 없고 그렇게 밖에 대답을 찾을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한없이 쪼그라든 사내가 멀뚱이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한숨을 쉬었지요.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난감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그녀가 묻지 않더라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 중 하나가 그거였습니다. 눈을 떴을 때부터 눈을 감을 때까지 머리를 헤집고 다니는 생각입니다. 아, 아니군요. 때로는 잠이 들었을 때에도 꿈속을 돌아다니며 괴롭히는 생각입니다. 어떻게 뭘 하며 살아야만 할까 고민을 한다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입니다. 답답하지요. 지켜보는 사람도 그렇겠지만 저야 오죽할까요. 허리까지 빠져드는 펄에 갇혀 허우적대는 꼴입니다. 생각의 끝에는 늘 하나의 말이 맴돌고야 맙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살아온 발자취가 오늘을 만들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예전 시골에서 갓 상경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을 했을 물건이 있습니다. 남, 녀의 차이도 없고 노, 소의 구별도 없는 공통된 물건입니다. 월세가 저렴한 자취방을 구하고는 바로 시장을 어슬렁거려 제일 먼저 사야만 했던 비키니 옷장입니다. 옷장의 바닥면에는 이불과 요를 넣고, 상단의 공간에는 옷을 걸 수 있게 만들어진 비키니 옷장은 얇은 홑겹의 천에다 지퍼를 달아 문을 대신했던 간이 옷장이었죠. 엉성한 쇠파이프로 틀을 잡고 천을 씌워 이불이며 옷을 넣어 너저분함을 가릴 수 있게 했던 옷장 하나면 깔끔하게 정리정돈된 방으로 탈바꿈시켜주던 마법을 부리곤 했습니다. 가난한 청춘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양념이 아닐까 싶은 비키니 옷장입니다.


용달차를 불러 종이 상자 몇 개와 비키니 옷장 하나 달랑 싣고는 이사를 하던 기억도 새록새록합니다. 가진 것 없어서 오히려 그만큼 꿈도 많았던 시절의 옷장엔 형형색색의 꿈이 한가득 들어차기도 했는데, 아직도 용달차의 짐칸에 앉아 옷장을 붙들고 있는 것만 같아 쓴웃음을 웃게 됩니다. 청춘의 꿈과 뜨거운 피는 노을이 되어 저무는데 아직도 용달차의 꽁무니에 앉아 내릴 수가 없네요. 오히려 기운 빠진 무릎과 흰 머리카락만 바람에 흔들리네요. 덧없는 날들만 징그럽게 매달려서 아양을 떱니다. 그러지 마라, 그러지 마라. 야단을 쳐도 어찌 된 일인지 껌딱지로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습니다. 원래부터 너와 나는 이렇게 한 몸으로 태어난 거야. 말을 하는 것만 같습니다. 비껴갈 수 없는 거라면 그러려니 해야 하나 봅니다. 운명인 거죠 뭐. 지친 몸처럼 마음도 슬금슬금 지치고야 맙니다. 딱히 기다리는 것 없는 길에서 초라한 이삿짐만 바람에 펄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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