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를 막 넘기면서 꽃은 피었다. 까악까악 까치가 울듯이...
까치수영穗穎이 피었다. 꽃은 6월부터 8월에 이르기까지 여름을 오롯이 관통하며 피고 진다. 하얗게 터진 팝콘이 떠오르는 모양으로 산천에 흐드러지게 피는 꽃이다. 뭐랄까?기원하고 염원하는 마음을 담은 꽃이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천으로 피고 지는 꽃의 특성이 그렇고, 여린 순을 데쳐 나물로도 먹었다 하니 또한 그렇다. 주린 배를 채운다는 건 엄중하고도 절박한 것이라서 이름 하나에도 허투루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배고픈 백성의 푸념과 기원이 버무려진 이름, 까치수영. 조팝나무나 이팝나무, 아니면 며느리밥풀꽃처럼 애닯은 이름일지 모르겠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건넌 '보릿고개'를 지나면서 산과 들에 하얗고 탐스럽게 피는 꽃, 그 꽃을 보면서 농심은 풍년을 기원했겠지. 너른 들판에 모내기가 끝날 무렵이기도 해서 가을의 황금들판을 생각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했을 터다.
까악까악 까치가 우는 아침, 마당을 쓸던 아비는 '반가운 손님이라도 오시려나? 까치가 우는 게 좋은 일 있으려나 모르겠네!' 중얼거리며 억지웃음이라도 짓게 되는 마음도 한 몫을 했겠다, 싶다. 까치는 예나 지금이나 반가운 손님을 부르는 상징적 의미가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있지도 않는 까치에게 수염을 선물할 이유는 없어서 더욱 그렇다. 아, 까치수영의 정식명칭은 까치수염이다.
이른 봄 풍년화가 만개하면 풍년이 든다, 하는 염원이나 들에 흉년이 들면 산에 풍년이 든다, 하는 말들 속에는 기어코 살아야 하는 절박함이 오래된 떼처럼 덕지덕지 엉기게 마련이다. 꽃 하나 피었을 뿐인데 그 꽃송이 쥐어잡고 '너는 이랬으면 해 하는 협박과도 같은 절규를 쏟아야만 했던 시절이 투영된 말들과 이름들. 비단, 어제만의 이야기는 아니어서 무심하게 피고 지는 저 꽃들을 나 또한 무심히 지나치지를 못하는 것이고.
그냥, 뭐 특별할 것 없는 무심함에 지극이 녹아 끈적한 마음, 그래서 들꽃을 보노라면 거울을 보는 것도 같아. 이렇게 돌아가고, 저렇게 애둘러도 결국은 마주앉아 푸념하게 되는 내가 거기에 있고, 세상만사 존재의 가치는 정해진 규격으로 매겨지질 않아서 거울의 반추는 더욱 무겁다고 하겠다. 평균값이 무슨 소용이고 절대적인 잣대가 될까? 다만, 온전한 나만의 시각에서 만들어지고 부서지는 게 세상이고 우주의 끝이기도 하지.
아는 만큼 보이고 누리는 만큼이 세상의 전부겠지. 그래서 오늘도 '까치수영'이 피었는지 모르겠다. 수영穗穎은 말 그대로 여문 곡식의 이삭을 뜻하는 말이다. 벼이삭, 보리이삭, 수수이삭.... 알토란으로 이삭이 여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보태고 또 보태서 오늘도 까치수영이 지천으로 피고 또 진다. 내일이라도 부른 배 토닥이며 맛깔스럽게 졸았으면 좋겠다. 예나 지금이나 땅 파먹고 사는 농심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