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꽃 그대

정말 몰랐어

by 이봄

몇 번이고 지나치던 길이었지만 그저 돌각담에다 잡풀만 무성하다 생각했어. 도시로 쫓겨난 농부들의 작품일까? 하나 둘 늘어선 텃밭에 시선을 두고 '대단한 사람들이야' 감탄을 했었어. 혓바닥 길게 뺀 자투리땅은 도로를 접하고 누워 있었지. 노란 꽃 방울방울 피워낸 애기똥풀이 마른 도랑을 따라 피었고, 하얀 花冠이 무색한 개망초는 갖은 구박에 잔뜩 주눅 든 얼굴로 피어있었어. 단지 그게 다였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몰랐던 거야.

으레 그럴 거야 했던 지레짐작이 많은 것들을 가리고 눈을 가렸는지도 모르겠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닿아도 느끼지 못하는 최면에 빠졌는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눈 뜬 장님처럼 걷던 날에는 보고 싶은 것들만 곱절을 부풀려서 봤다는 얘기야.

터벅터벅 걷고 있었어. 못 보던 고추 모종이 줄을 맞춰 심어졌고 때 이르게 심었던 열무는 벌써 장다리를 키우고 꽃을 피웠더라고. 소문도 없이 계절이 바뀌고 있었어. 밤나무 가지 끝에도 누렇게 꽃줄기가 매달려 잔뜩 몸집을 키우느라 정신이 없던 걸 오늘에야 보았던 거야. 무심하다 하더니만 정말 무심하더라고. 세월은 무심히 흘렀고 그것도 몰랐던 나는 무심한 사람이었지. 지천으로 꽃이 피고 질 때 무심함도 덩달아 만발했었나 봐.


잡다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려든 건 순전히 꽃송이 하나 때문이었어. 주변에 스며들어 몸을 숨긴 꽃이었다면 이런 생각도 소용이 없었을 테지만, 꽃은 화려했고 지나칠 정도로 눈에 띄었다는 게 문제였어. '저를 좀 봐줘요?' 잡아끄는 손이 오히려 민망했을 거야. 붉은 꽃잎은 초록의 물결에 스민 핏빛이었어. 너무나 붉어서 불처럼 뜨거웠어. 가까이 다가서면 금방 데일 것처럼 붉게 타고 있었는데 어떻게 지나쳤을까? 그 열기에 놀라고, 그 붉음에 몸서리쳐야만 했을 텐데 말이야.


머물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던 족속이 있었어. 온갖 구박과 멸시를 덕지덕지 몸뚱이에 붙이고 떠돌 수밖에 없던 그들은 동굴 깊은 곳에 모여 자신들의 언어와 몸짓으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어. 그래서 그들의 춤과 노래는 서러웠고 아팠어. 때로는 아픈 만큼 뜨거웠고 열정적이었다 했어. 피를 토하는 몸짓인 거야. 드러내어 노래할 수 없는 노래는 그래서 속으로 파고드는 옹이처럼 검붉어서 슬펐지. 꽃송이 하나 그렇게 피어있었는데 나는 보지 못했어. 애초에 거기 그 꽃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못했던 거야. 미안했어.

그래서 미안한 마음을 쓰고 새겼어.


"붉은 꽃 그대 어여뻐 눈물짓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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