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밤 한 톨 호박잎에 감싸면

by 이봄

학교를 오가며 마주치는 길에는 키 큰 미루나무 몇 그루 군부대의 철조망을 따라 서 있었고, 신작로 양편으로는 하얀 은사시나무가 줄지어 자랐다. 정수리에 햇살 이글거리면 은사시나무 그림자는 어김없이 동그란 모양으로 바둑돌 놓이듯 점점이 놓였다. 그건 마치 개울가에 놓여있던 징검다리와도 같았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유혹이 있었다. 잠깐이라도 징검다리 커다란 돌에 앉아 물장난이라도 쳐야만 하는 그늘이었다. 그늘은 하굣길의 꼬맹이들 서넛이 둘러앉아 땀을 식히기에 충분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 아이들도 그늘에서 그늘로 옮겨가며 더딘 하교를 했다. 책가방을 들쳐 맨 등줄기에 땀이 맺힐 때쯤이면 그림자를 찾아 땀을 식혀야만 했다. 매고 있던 책가방을 냅다 벗어놓으면 등줄기 가득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뭐가 그리 재밌었는지 까르르까르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흙바닥에 그림도 그리고 아까시나무 이파리 줄기를 뜯어다가 마음에 두었던 계집애를 떠올리며 이파리 점을 치고는 했다. 이파리 하나씩 떼어내며 '좋아한다, 싫어한다'를 점치는 것만으로도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다. 그것도 지겹다 싶으면 동그란 자갈 몇 개를 고르고 흙바닥에 변형된 장기판을 그렸다. 뭐라 뭐라 부르던 이름이 분명 있었는데 이름은 가물가물 떠오르지 않는다. 장기처럼 상대방의 말을 잡는 놀이였다. 그렇게 놀이에 빠져 그늘 섬 하나를 옮겨가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중천에 떴던 해가 서산에 기울어서야 겨우 먼지 이는 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 뜸하기는 했지만 가끔 경적을 울리며 버스가 지나갔고, 군용 트럭이 줄지어서 지나가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숨을 참아가며 흙먼지가 날아가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바람이라도 부는 날에야 금방 뽀얗게 일었던 먼지가 사라졌지만, 바람 한 점 없는 날이면 먼지를 꼬박 뒤집어써야만 했다. 햇살이 뜨겁다는 핑계를 앞세웠지만 말처럼 핑계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저 동무들과 어울려 웃고 떠드는 게 좋아서 먼지 뽀얗게 뒤집어쓰면서도 나무 그늘에 앉아 장난을 쳤을 터였다. 섬에서 섬은 멀기만 했고 해 걸음은 빠르기도 했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겨우 그늘에서 벗어나 각자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굴뚝에선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마을엔 구수한 밥 냄새가 들어차고 있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가방을 들쳐 맨 꼬맹이들은 흙바닥에 주저앉아 웃고 떠들고 있었다. 점심으로 도시락을 까먹은 지도 한참이 지난 시간이라 배가 고팠는지 아이들의 옆에는 껍데기를 벗겨 반쯤 씹어먹던 무가 놓여있었다. 시퍼런 무청을 비틀어 잘라내고 입으로 무의 머리를 한 입 잘라내면 두꺼운 껍질은 잘도 벗겨졌다. 엄지손톱을 무의 속살과 껍데기 사이에 밀어 넣고 벗기는 재미가 있었다. 길바닥에서 시간을 다 보내고 집으로 걸음을 옮길 때쯤이면 출출하기도 했고, 목도 말랐다. 길가 무밭에서 잘 자란 놈으로 하나를 골라 뽑아 들면 출출하던 배도 달랠 수 있었고, 갈증으로 타던 목도 축일 수 있었다. 길옆에 심은 무 한 고랑은 그래서 늘 꼬맹이들의 차지였고, 무밭의 주인도 으레 그러려니 했다.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계절은 이름을 바꿔 달았다. 아무리 유난을 떨던 여름이라도 계절 앞에서는 속수무책 힘을 잃었고 일순간 순한 양으로 낯빛을 바꿨다. 마치 그것은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사람을 위협하던 사나운 개도 개장수 앞에선 꼬리를 말아 감고 맥을 못 추는 것과 같았다. 입추를 지난 햇살은 빈 깡통의 요란함에 지나지 않았다. 한낮의 따가움 뒤에 숨어 허세를 떨었지만 더는 사람들을 몰아세우지 못했다. 길가에 한들거리는 코스모가 꽃을 피우기 시작하고, 노란 달맞이 꽃잎에 찬이슬이 내리면 날씨는 급격하게 가을로 변했다. 계절이 바뀌면서 아이들은 더 이상 그림자에 깃들어 노닥거리지 않았다. 아이들 몸집만 한 가방은 여전히 어깨에 매달려 흔들렸고, 길가엔 잔뜩 살이 오른 무가 아이들을 유혹해도 못 본 척 딴청을 부렸다. 오히려 등이라도 떠밀린 것처럼 아이들은 숨을 헐떡거리며 달음박질쳤다. 누가 누가 더 빠른지 내기를 하기도 했다. 멀기만 하던 길은 어느새 절반으로 줄어들어 있었고, 해걸음이 되어서야 겨우 들어서던 집은 길이 줄어든 만큼 가까웠다.

"할머니, 학교 다녀왔습니다."

아이는 가방을 벗어던지며 쪼르르 부엌으로 달려가 할머니를 찾았고, 할머니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화로를 뒤적여 뭔가를 꺼냈다. 뭔가를 감싼 껍데기는 까맣게 타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주먹만 한 고구마 같기도 했고 불에 탄 감자 같기도 했다. 할머니 옆에 쪼그려 앉아 호기심 가득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할머니와 검게 탄 그것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할머니? 이게 뭐예요?"

더는 궁금함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아이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할머니에게 물었다. 궁금했다. 할머니 곁으로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앉으며 재차 채근했을 때 할머니는 대답했다.

"욘석아? 잠깐만 기다리면 될 것을.... 이 할미가 너 주려고 풋밤 몇 알 구웠지"

아, 그랬구나. 먼 길 걸어왔을 손주가 행여나 출출할까 싶었던 모양이다. 아직 제대로 여물지도 않은 푸른 밤송이를 어떻게 따셨을까? 잔뜩 굽은 허리는 곧게 펴지지도 않았을 터였고, 커다란 장대는 휘휘 휘젓기에도 힘에 부쳤을 게 분명한데, 까치발로 매달려 장대와 씨름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완두콩처럼 파란 밤송이는 여물지 못해 가시를 세우지는 않았지만 톡 하고 알암이 벌어지지도 않았다. 굴러가지 못하게 발로 밟고는 뾰족한 작대기로 일일이 밤송이를 까야만 했다. 할머니에겐 그것조차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가지 끝에 매달린 밤송이를 두들겨 따는 것부터 뾰족뾰족 가시를 세운 밤송이를 벗겨내는 것까지 한바탕 씨름을 해야만 했으리라. 그리고는 힘들게 얻은 풋밤이 행여나 탈까 싶어서 호박잎 몇 장을 겹겹이 겹쳐 싸맸다. 까맣게 탄 겉껍질을 벗겨 냈을 때 그 속에는 파랗게 구워지듯 쪄진 호박잎이 나왔고, 마지막 한 겹을 마저 벗겼을 때 뽀얗게 익은 풋밤이 얼굴을 내밀었다. 군밤도 아니었고 찐 밤도 아니었다. 풋밤이라 부드럽기도 했지만 호박잎 두껍게 감싸 구운 밤은 부드럽고 달큼했다. 고소하고 구수했다. 어떤 말로 설명을 해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아직까지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가을을 부르는 맛이라고 하면 그나마 어울리는 설명이 아닐까. 아니면 등이 굽어 더욱 조그맣던 할머니가 풋밤이었는지도 모른다. 화로의 잿불에 묻어 뭉근하게 구워진 풋밤은 호박잎의 달큼함이 스며 있었고, 등 굽은 할머니의 거친 손맛이 배어 있었다. 까끌까끌한 손바닥으로 등을 긁어주는 것처럼 시원했다.

같이 늙어가는 형제들 쪼르르 무덤가에 둘러앉아 나누던 말끝에 밤송이의 가시가 따가워지는 요맘때면 할머니가 호박잎 싸매 구워주던 풋밤이 생각난다 말을 했더니만 형제들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너는 그런 밤도 먹었구나. 난 구경도 못해봤는데.... 하긴, 할머니가 막내를 예뻐하긴 했지."

"맞아요? 할머니는 늘 오빠만 더 챙기고 좋아했어요."

서운함이 잔뜩 뭍은 얼굴을 하고서 누이가 말을 받았다. 정말 그랬었나? 하도 오래된 일이라서 기억이 희미했다. 얼마나 서운했으면 다 늙어버린 지금에도 마음에 남았을까. 할머니는 특별히 아들 딸을 구별하지도, 차별하지 않았다. 모를 일이다. 어린 마음에도 서운했던 뭔가가 있었으니까 무덤가에 앉아 그렇게 말을 했겠지. 다만, 초가을 풋밤이 여무는 날들이면 할머니는 호박잎 한 움큼 뜯어 들고서 밤나무 밑을 서성거렸다. 하나뿐인 여동생을 서운하게 만들었던 서성거림이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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