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좋다

by 이봄


길이란 게 뭘까? 짐승이 거듭해 다닌 길이 오솔길이 되고, 사람의 걸음을 보태면 이웃한 마을을 잇는 널따란 도로로 완성되기도 한다. 뜻 없이 걷는 걸음은 배회에 지나지 않아 겹겹이 걸음이 쌓이는 일은 없을 터라서 짐승의 것이든, 사람의 것이든, 길에는 뜻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길이란 관념적 이상에 이르는 길도 결국 길道이라 말하는 이유일 게다.

오고 간다는 건 묻고 답하는 소통의 문제이기도 하고 배고픔을 달래주는 밥이기도 하다. 먹는 것을 구하고, 너의 마음을 구하고, 이치를 구하는 걸음은 길을 만들고, 살아있는 것들을 끌어모았다가 처음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도 결국은 길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길은 심장을 뛰게 했고 이유도 없는 그리움에 몸서리치게도 했다. 등 떠밀거나 손을 잡아끄는 사람 하나 없어도 소실점 끝 아스라한 그곳을 동경하게도 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몇 번이고 신발끈을 동여매고 풀기를 반복하는 것도 어쩌면 길이 퍼트린 전염병일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전염된 병은 숨죽여 잠복했다가 불현듯 깨어나 떠나기를 강요하곤 했다. 나쁘지 않았다. 어느 날엔가는 꾐을 이기지 못해 낯선 이국의 길을 한 달이 넘게 걷기도 했다.

제 몸집보다 큰 가방을 들쳐 메고서 길을 걷던 때부터 익숙하고 친근했는지 모른다. 비지땀을 쏟는 여름날이나 눈보라가 매섭던 겨울날에도 국민학교를 오가던 걸음은 늘 길 위에 있었고 뛰거나 걷는다는 건 그저 길동무에 지나지 않았다. 지루할 틈도 없는 놀이이었는지도 모른다. 맹랑한 꿈 한 자락도 길에서 꾸었을 터였다.

걸어도 걸어도 끝나지 않아 더 좋은 길은 커다란 나무를 지탱하는 뿌리였고 자양분을 공급하는 커다란 창고였다. 화수분처럼 샘솟는 것들이 손을 잡아끌기도 하고 때로는 풀 죽어 주저앉은 나를 일으켜 세워주던 용기였는지도 모른다. 길의 끝에서 기다리는 게 무엇이 됐든 중요하지 않았다. 설령 기다림조차 없다고 해도 실망할 것도 없다. 걸었으니 됐다. 길에서 만난 모든 것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그만하면 됐다 해야지 과한 욕심은 추할 뿐이다.

달력의 마지막 한 장을 뜯었을 때 또 다른 한 해가 기다린다는 게 좋았다. 걸어야 할 길이 아직 남았다는 얘기였고 비척비척 걷는 걸음일지라도 걸을 수 있는 몸뚱이가 있다는 게 좋았다. 범종의 울림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대고 요란을 떨지 않아도 새날은 기어코 열렸으니 굳이 외면할 이유도 없다. 나름의 반가움으로 반기는 바다. 신발끈 바짝 동여매고서 저기 마을 어귀까지 만이라도 걸어야겠다. 길이 손짓하는 첫날이란다. 오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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