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by 이봄


어느 햇살 좋던 날 바람이 살랑살랑 마당을 쓸었다. 한낮의 햇살에 달궈진 마루는 적당히 따뜻했고 보드라웠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것들이 좋아서 한동안 손을 떼지 못했다. 파란 하늘과 빨간 잠자리가 서로를 품었다 놓아주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얕은 물가에 머리보다도 큰 눈을 매달고 몰려다니는 송사리처럼 잠자리의 자맥질이 분주했다. 따뜻하게 데워진 마루에 엉덩이를 붙이고 상체는 삐딱하게 기둥에 기대고 앉았다. 발장난만 한가롭던 시간이었고 무료함에 하품이 내려앉은 시간이었다.

더위가 막 물러난 자리엔 덩그마니 아이들이 마을을 지켰고 더러는 살랑살랑 바람이 몰려다녔다. 마당을 기웃거리다가 이내 인적 없는 부엌을 가로질러 뒤란으로 달아났다. 그럴 때마다 수명을 다한 경첩이 끼이익 바튼 비명을 질렀다. 댓돌에 기댄 강아지가 하품을 했고 낮동안 늘어졌던 호박잎이 부스스 깨어나고 있었다. 뉘엿뉘엿 지던 해가 산마루에 걸터앉아 담배 한 개비 피워 물면 부지런한 집 굴뚝에선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아이 혼자 지키고 있는 집은 무료했고 어른들이 지키고 선 들은 지는 해가 야속하게 분주했다. 발만 까딱거렸다. 그럴 때면 파란 하늘에 빨간 잠자리 떼로 몰려와 자맥질을 하고, 아이는 덩달아 숨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첨벙첨벙 뛰노는 가을이 벌겋게 익었다.

"세월이 좀이라도 먹는다던?"

제일 늦게 나타난 놈이 늘 입에 달고 살던 말이다. 약속시간은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종잡을 수가 없었다. 엿장수 맘대로라고는 했지만 놈은 엿장수의 할아비쯤 되는지 세상 느려터지고 낯짝은 두껍기가 한 뼘쯤 되려는 지도 모르겠다.

"너 빨리빨리 안 다니지?"

말이라도 꺼낼라치면 잽싸게 고놈의 좀먹은 세월타령을 했다. 그럴 때면 어찌나 재빠르고 날렵하던지 같은 녀석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녀석의 능청을 자르며

"그래, 됐다 됐어.... 앉아라"


그때는 알지 못했다. 세월도 좀이 먹고 몸뚱이도 벌겋게 녹이 슨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짓궂은 바람에 끼이익 비명을 내지르던 경첩이 에구구 구구 비명을 뱉는 내게 다가와 등을 토닥거렸다.

"세월이란 게 다 그런 거야. 너무 서운해도 말고 절망할 것도 없어!"

어쩐지 토닥이는 그의 손길이 싫지만은 않았다.

깨닫지 못하고 지나치는 게 어디 하나 둘이겠어. 꼭 때를 놓치고서 나중에 어렴풋이 깨닫게 되는 것들이 쓴웃음을 짓게 하지만 그것 역시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먼저 산 사람들은 그래서 싫다는 잔소리를 멈추지 못하는 이유가 될 테고, 그럼에도 아직 때가 아닌 젊음은 귓등으로 흘리고 말이다.

별것도 아닌 기억이 때때로 종일 흥얼대는 콧노래처럼 입에 들러붙는 날도 있다. 추억을 곱씹을 나이려니 하다가도 하찮은 기억인데 지워지지 않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따뜻이 데워진 마루에 앉아 잠자리들 떼 지어 나는 모습을 바라보던 기억은 왜 어제처럼 선명한 걸까? 모르는 것 투성이로 하얗게 세월을 이고 섰지만 역시나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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