쏜살같아

by 이봄


며칠째 이어진 비는 오늘도 여전하고, 솜뭉치처럼 젖은 몸은 무겁고 발걸음은 천 근으로 매달려 주저앉았다. 그래도 나서면 어떻게든 걷게 되겠지만 마음 하나 고쳐먹기가 말처럼 쉽지는 않다. 지난밤 비에 젖은 배낭은 꾸역꾸역 내장을 토해내듯 뱃속에 든 것들을 쏟아내 방바닥이 어지럽다. 제대로 마르지 못한 옷가지며 침낭까지 '날 잡아 잡수~~!' 널브러져 시위를 하는 통에 정신이 없지만 어쩌랴. 수를 놓듯 다시 배낭의 홀쭉한 배를 채워야 내리는 빗속을 걸을 터였다. 한숨 한 번 길게 뱉어내고서 한바탕 굿판을 벌여야지 도리가 없다.

괜스레 마음도 스산하고 몸뚱이도 찌뿌듯 말이 아니다. 날이 이모양이니 아침은 망설임으로 출발하고, 춥다 말하기는 과하지만 싸늘한 공기와 내리는 비가 야속하기 그지없다. 빈 들에 늘어선 플라타너스는 앙상한 가지를 동그랗게 말고 오들오들 떨었다. 그런가 하면 도심을 장식한 목련나무는 주먹만 한 꽃송이를 잔뜩 매달고는 계절이 무색하게 웃었다. 발에 차이는 오렌지야 이미 애물단지로 변해 보도블록을 어지럽힐 뿐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꽃이 피었고 낙엽이 뒹굴었다. 개구리는 도로에 뛰어나왔다가 참변을 당했다. 어차피 요놈들은 동면이란 말도 모를 터였다. 변화무쌍 유럽의 날씨는 널뛰는 무당의 굿판 같다.

30여 분의 앞을 내다볼 수도 없는 낯바꿈에 진저리를 치다가도 한파가 절정에 달해 얼어 죽겠다 너스레를 떠는 동생의 문자를 떠올리면 '그래? 동사의 위험보다야 꽃이 지천인 빗길이 낫지 뭐!' 스스로를 달랜다. 그렇지만 날마다 오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비가 내렸다. 서 말의 팥죽이 요란스럽게 끌었고 세상 모든 여인네들은 토라져 입을 네댓 발 내밀고 있었다. 계절의 이름이 무색했다. 진작에 수확을 끝낸 포도밭에는 괭이밥 노란 꽃이 끝도 없이 피어 바람에 흔들렸다. 목련이 피었고 카라꽃 흰 꽃대가 학의 목처럼 동네 어귀를 지켰다. 그래도 겨울이라고 여인네들은 가죽 롱부츠에 밍크코트로 잔뜩 멋을 부리고는 거리를 활보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겨울은 없었다. 오락가락 계절이 뒤엉켜 토라졌다. 기껏 생각을 추스르다가도 짐을 싸던 손을 멈추고야 만다. 생각도 오락가락 갈피가 없었다. 어르고 달래도 결국은 알 수 없는 날씨에다 마음이다.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고 했지만 이미 젊음 하고는 멀찍이 떨어진 나이였고 짊어진 배낭은 어깨를 파고들었다. 거기에다 날씨는 날마다 심술을 부린다. 내가 왜 이 짓을 사서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엄살을 떨었다. 그나저나 햇살 반짝이는 길은 언제 다시 보려나 모르겠다. 아니, 볼 수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지겹게 추워도 눈 시리게 파란 대.한.민.국.의 하늘이 그리운 아침, 계절의 이름을 떠올렸다. 겨울이었다.

나서면 가게 되는 길을 목전에 두고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길었다.

"친구야? 어여 짐을 싸라! 그래도 가야 하지 않겠나? 저 앞에 길이 있으니...."


꼬박 칠 년의 세월이 흘렀다. 기억은 이미 가물가물 희미하다. 걸음걸음은 두리뭉실 하나로 묶여 그저 길을 걸었을 뿐이다. 꽃이 피었고 개구리가 겨울비를 반겼다. 침이 한 바가지쯤 고일 레몬이 노란 무덤을 만들고 있었고 괭이밥은 지천으로 피어 아양을 떨었다. 신앙도 없는 내가 순례자가 된 그 길에서 겨울비는 억수같이 내렸다. 오래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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