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天下

by 이봄


질척대는 눈을 밟았다. 느티나무 높다란 가지며 측백나무 얇은 이파리를 하얗게 뒤덮었던 눈은 맥없이 녹았다. 더러는 불어 가는 바람의 꽁무니에 매달렸다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까치와 어치가 번갈아 날아와 자리다툼을 했고, 그 작은 소란에도 어김없이 쌓였던 눈은 와르르 쏟아졌다. 준비된 낙화도 아니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힘 한 번 쓰지도 못하고 꼬리를 내리는지 지켜보는 사람이 민망해서 눈길을 거둬들였다. 지켜보는 나나 속절없이 떨어지는 눈이나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저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모르는 척 딴청을 부리고 헛기침으로 궁색한 시간을 모면하는 거. 그게 전부였다.

그 와중에 그나마 간밤의 백색왕국이 있었다는 걸 증명하는 건 꾹꾹 눌러 뭉쳐놓은 눈사람이 전부였다. 사실 눈사람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커다란 눈 뭉치에 불과했지만 바닥에 뒹구는 나무껍질과 길쭉한 측백나무 이파리 몇 개 때문이었다. 불과 서너 시간 이전에는 눈사람의 길게 찢어진 입이었고 커다란 눈망울 위에 기어가던 송충이 같은 눈썹이었다. 포연 가득한 전장에서 장렬히 전사한 군인처럼 한 점 미련도 없이 바닥에 누웠다. 눈썹과 코와 입이 사라진 눈사람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녹아 뭉개지고 있었다. 햇살도 없는 오후였지만 부는 바람만으로도 눈은 전의를 상실한 지 오래였다. 온 천하를 손아귀에 틀어쥐고서 천 년을 누릴 것만 같던 기세 등등 하던 모습은 오간데 없고,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이 애처로웠다. 무너지고 녹아내려 질척거렸다. 하루 낮 밤을 지켜내지 못한 권력은 패잔병의 그것처럼 허무했고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뭔 놈의 겨울비가 이렇게 청승을 떠는지 모르겄어야!"

그의 말을 빌리자면 늦은 오후에 시작된 비가 주룩주룩 옷깃을 적시고 그것도 모자라 마음마저 축축하게 적셨다고 했다. 수도권에는 눈이 내렸고 아랫녘에는 비가 내린 모양이다. 사람들은 늘 말끝에 좁은 땅덩어리를 탓하며 이웃한 땅부자 나라를 시기 질투하며 투덜댔지만 비가 내리고 눈이 내렸다. 어디에서는 해가 뜨고 또 어디에서는 비가 내릴 만큼의 땅뙈기면 되었다 싶기도 했다. 송곳 하나 꽂을 땅 없이도 사람들은 모진 세월을 살았다. 사내들은 등짐을 졌고 아낙들은 광주리를 이었다. 이고 진 등짐이며 광주리에선 생선이 펄떡거렸고 짭조름한 소금 섬이 땀으로 흘렀다.

"거기는 워뗘? 여그처럼 비가 청승을 떠는가 모르겠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쿰쿰한 청국장을 닮아 보글보글 끓었다. 겨울 대파 하나 뚝뚝 손으로 끊어 넣으면 산해진미가 부러울 것 없는 청국장처럼 그는 늘 보글보글 구수하게 끓었다.

"아니, 여기는 펑펑 눈이 내려. 함박눈은 아니지만 그래도 볼만한 걸...."

눈발이 제법이었다. 이미 어둠이 내린 하늘에 하얀 눈이 툭툭 튀어나왔다. 예전 조그만 오락실에서 봤던 두더지 잡기의 두더지 같았다. 어느 구멍에서 불쑥 고개를 내밀지 모르는 두더지처럼 어둠 속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눈이 느닷없다. 물끄러미 내리는 눈 바라보다가 뚝뚝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뭔 일이래? 오매 단풍 들겄네... 도 아니고"

느닷없는 건 내리는 눈만 그런 게 아니었다.


지난밤 눈사람을 만든다 호들갑을 떨며 밟아 다져진 발자국 몇 개가 남아 짧았던 설국의 최후를 증언하고 있었다. 설설 내린 눈의 끝에는 슬슬 꼬리를 말고 내빼는 겨울이 있었고, 청승을 떨며 펑펑 내리던 눈은 울컥 눈물을 불렀나도 모른다. 나풀나풀 나비가 날고 너울너울 춤사위가 곱던 누군가가 있었을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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