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달 뜨면

by 이봄


담배 한 개비 피워 물고서 새벽 이른 시간을 서성일 때면 그믐달 곱게 떠 길을 비추곤 했다. 그믐이 되기 전 며칠 동안만 동쪽 하늘에 떴다가 물러나는 새벽과 함께 달아나는 달이 그믐달이다. 하얀 손톱눈을 닮았고 서울에서 전학을 왔다던 계집애처럼 여리고 야윈 얼굴이었다. 부는 바람에도 꽃잎 하나 톡 하고 떨굴 것만 같은 그래서 두꺼비 같은 손바닥 활짝 펴고서 바람을 막아서고 싶었던 계집애가 새벽하늘을 밝히는 거 같아 애처로웠다.

"있잖아, 거기 좀 비켜 줄래?"

새초롬 실눈을 뜨고서 계집애는 비켜달라고 했다. 정작 왜 앞을 가로막고 있는지는 묻지도 않았다. 게다가 내 이름은 부르지도 않았다. 순간 나는 거기가 되었고 내 이름 따위는 개나 물어가면 그만이었다.

"뭐 이딴 계집애가 다 있지?"

부아가 치밀 만도 했는데 슬그머니 한 발 물러나며 머리를 긁적이고 말았다. 게다가 더 웃기고 한심한 건 말을 버벅대며 미안하다 사과를 했다는 거였다.

"미... 미... 미안해! 부러 그런 건 아니야"

얼굴엔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고 그만큼 벌겋게 달아올랐다. 정말 미안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남의 눈에는 분명 그렇게 보였을 거였다.

"미안하면 빨리 비켜 줬으면 좋겠어!"

찬바람이 쌩 하고 불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뱉는 순간 계집애의 말은 한층 더 매워졌고 한 발 물러선 나는 그만큼 더 부끄러웠고 부아가 치밀었다. 괜한 사과를 했구나 생각을 하니 울그락 푸르락 달아오르는 얼굴을 숨길 수가 없었다.

'얘? 미안하다더니 지금 벌겋게 달아오른 그 얼굴은 뭐니? 정말 미안하긴 한 거니?"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계집애는 계집애 대로 입을 삐죽 내밀고는 훽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무안하고 황당한 일이었다.

강산이 변한다는 십 년 세월을 몇 곱이나 더 보내고서도 새벽 동쪽 하늘에 뜬 그믐달을 보면 파리한 계집애의 얼굴이 떠올랐다. 뭐 좋은 기억이라고 점점 더 또렷해지는 그때의 일도 빠지지 않고 얼굴을 내밀었음은 물론이다. 정작 계집애는 알고 있을까? 머리가 허옇게 샌 촌놈이 아직도 그때를 떠올려 헛웃음을 짓기도 하고 살짝 가슴도 설레어한다는 것을. 갑작스럽게 불어 가는 돌개바람처럼 뜬금이 없었지만 멀쩡한 삼태기는 벌러덩 배를 들어내고 자빠졌고, 내동댕이쳐진 바가지는 깨져 조각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난장을 치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딴청을 피우는 돌개바람이었다. 계집애도 다르지 않았다. 그 긴 세월을 태연자약 건너와 마음을 열어젖히는 꼴이 꼭 돌개바람 같았다. 따지고 보면 계집애와는 상관도 없는 일이었지만 달을 빙자해 때때로 되살아나는 탓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었다.

그런 거였다. 그러니까 어쩌자고 달빛을 닮은 뽀얀 얼굴로 생글생글 웃느냐 말이다. 게다가 뾰로통 쏘아붙이는 말은 또 어쩌자고 그렇게 바람처럼 맑았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러더니만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사라지는 것까지 꼭 바람을 빼다 박았다. 다시 도회지로 간다던 계집애는 뭐라 뭐라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꿀벌 몇 마리 귓구멍에 자리를 잡고 웅웅 바람소리를 냈다. 벌들의 날갯짓에 말들은 흩어지고 겨우 웅웅 바람 소리로 울었다.

"안녕! 다들 잘 있어.... "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던 그때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아이들 뒤에 한 발 물러서서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지.

"안녕! 잘 가...."

침을 삼키다가 그만 잘 가라는 그 말을 삼키고 말았다. 다시는 꺼내 들려줄 수도 없는 말은 허무하게 소화가 됐으려나 모르겠다. 가끔은 미식미식 속이 쓰린 걸 보면 미처 소화되지 못한 그 말이 자꾸만 식도를 기어오르는 것만 같아. 그믐달을 보면 계집애가 손짓을 하는 것도 그렇고. 이래저래 새벽을 서성이는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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