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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풍경

by 이봄


밤새 눈이 내렸다. 살며시 다녀가시는 누구처럼 눈은 소리도 없다. 마주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새벽이 다 지나도록 눈이 내렸고 온 세상이 하얗게 낯빛을 바꾸는 동안에도 마주하지 못하면 알 수가 없었다. 아침에 눈을 떠 방문을 열었을 때 마주한 풍경이라니? 놀랍고 신비스러워서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어안이 벙벙하게 눈은 늘 그렇고 오셨다가 까치발로 조심스레 가셨다.

잠 깰까 조심스레 어루만지던 어미의 손길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머리맡에 앉아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뭐라 뭐라 읊조리던 말씀이 뭐였을까 궁금했다. 어림짐작 어슴푸레 담고 사는 말들이 따뜻했다. 또 어떤 날에는 살며시 안아주던 너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가슴에 묻어둔 말을 닮았고 그래서 더 따뜻했을까. 눈 없는 겨울은 그래서 유난히도 추웠고 몸서리치게 외로웠는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눈 내리는 날은 거지들이 빨래하는 날이라 했을까. 안아주고 덮어주었다. 오들오들 칼바람에 베인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다.

소복이 눈이 쌓였고 쌓인 눈 위로 햇살이 부서졌다. 은빛 마당에 금빛 햇살이 반짝였다. 똑똑 고드름을 타고 눈 녹은 물이 떨어졌다. 뭐가 그리 바빴는지 쌩 하고 바람을 일으키며 자동차가 달려가고 그러거나 말거나 햇살은 반짝였고 뽀득뽀득 눈은 시끄러웠다. 그랬던 거 같다. 마루에 걸터앉아 수다를 떨었다. 어미는 그저 바라만 보았다. 벗어 둔 책가방 하나 덩그마니 졸고 있었고 아이는 신이 나서 떠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수다스러운 나다.

과거와 오늘이 뒤섞여 말을 걸었다. 겨울과 봄이 마주 앉아 떠들었다. 똑똑 눈이 녹아 떨어졌고 나뭇가지 사이로 겨울바람이 불었다. 늙은 산벚나무는 우두득 소리를 내며 쌓인 눈을 털었다. 은행나무 높다란 가지에 까치둥지 하나 주인을 잃어 비었다가 새 주인을 만났다. 까악깍 까치가 울었다. 어디서 눈 맞은 암수 한 쌍 날아와 둥지를 뜯어보더니 흡족했을까 은행나무와 벚나무를 오가며 한참을 놀았다. 마을엔 주민이 늘 모양이다. 고향집 마당에 내려앉은 겨울이 풍경 하나 그리고 있었다.

펜을 잡고는 멀리 흘러내리는 산줄기를 그렸다. 그 사이에 쌓인 눈밭을 그렸고 앙상한 가지와 정오의 그림자도 길게 그려 넣었다. 봄이면 하얗게 꽃망울 터트릴 벚나무 가운데 세워두고서 마당 가득 눈을 채웠다. 새벽 이른 시간에 일어나 눈을 쓸었다. 봉당에서 길까지 이어진 마당은 길고 넓어서 쓱쓱 비질하는 소리가 한참을 이어졌다. 새벽을 깨웠던 시간도 마당 구석에 세워두었다. 까치둥지 하나와 까치도 빠지면 섭섭하다 투정 부릴 풍경이었다.

섣달그믐엔 깨어있어야만 했다. 그믐밤에 잠들면 눈썹이 하얗게 샌다 하시던 할머니의 말씀 철석같이 믿고서 졸음을 내쫓던 아이는 그 밤 끝내 잠이 들었었다. 잠이 덜 깬 눈으로 '아, 내가 잠들었던 거야?' 울음처럼 들던 생각에 입을 삐죽 내밀던 아이는 정말 눈썹이 하얗게 새었다.

"아, 젠장! 할머니의 말씀은 사실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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