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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by 이봄


五里霧中이 맞다. 길을 걷는 것도, 내일을 바라봄도 그렇다. 희미하고 어슴푸레한 것들 더듬더듬 더듬는 게 사는 일이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고 화를 낼 이유도 없다. 신기루 바라보듯 조금은 흔들리고, 조금은 불명확해야 내일을 기대하고 꿈도 꾸게 마련이다. 헛된 꿈일지라도 착각의 힘이 세상을 견디는 꿈이 될 수도 있겠다. 명약관화 너무 또렷하면 오히려 무릎을 꿇어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감이 아니라면 베일에 가리어진 미래가 차라리 선물이 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을 잠시 해 본다.

산 허리를 휘감은 안개는 밥 짓는 연기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겨울비 몰아간 골짜기는 봄날의 어느 하루처럼 포근하고 고요했다. 며칠 전까지 쌓였던 눈이 녹고 그 자리를 차지한 안개는 계절을 희롱했다. 달아난 동장군은 골짜기를 벗어나지 않고 안개를 방패 삼아 적진을 염탐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누구든 방심은 몰락을 의미했다. 상대의 허를 찌르는 화살은 빛났고 창끝은 날카로웠다. 안개 가득한 골짜기는 그래서 팽팽한 긴장감으로 숨을 죽였다. 이렇듯 계절도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데 하물며 사람의 일이야 뉘라서 장담을 할까. 알 수 없는 내일이 안개 휩싸인 앞 산 허리춤처럼 봐줄 만했고 나름의 묘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괴변이 아니다. 내일은 어떻고 모레는 또 어찌어찌 벌어지겠구나'를 다 알고 나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 몰라 더 아름다운 삶이다.

모르는 게 약이다. 무지해서 정말 모르는 바가 아니라면 수많은 관계와 인연이 얽히고설켜 새로운 삶의 낯빛으로 엮어지는 게 인생인데, 눈앞에 펼쳐질 드라마야 기다리면 그만이다. 시청자의 입장을 넘어 광분하지 마라. 드라마는 작가의 몫이다. 살려라, 죽여라 선을 넘으면 다큐멘터리도 막장으로 치닫게 된다. 미루어 짐작하지 말고 속단해 결론짓지 않을 잠시의 미룸이 몰라 좋은 숨 고르기의 시간이다. 서너 숨 몰아쉬며 방관하는 관조, 그래서 골골마다 안개 기어오르는 저 산허리 어디쯤 걷고 있을 인생이 차라리 좋다 할 터다. 그게 내 삶이어도 그렇다. 가끔은 온전한 방관자의 시선으로 쉬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굳이 미래를 알려 마라. 꽁꽁 싸매고 주렁주렁 자물쇠가 달려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굳이 관심을 두지 말라는 것에 목숨을 거는 건 치기에 가깝다. 판도라의 상자는 그냥 두는 게 좋다. 적당한 게으름도, 일정한 방관도 어쩌면 내 삶을 풍요롭게 살찌울 자양분 일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다. 모르니 뛸 것이고, 불확실하니까 더욱 열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거다. 그러니 파랑새를 찾아 길 떠나는 아이에게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각자의 길은 따로 있고 길 위에서 맞닥뜨릴 경험도 따로 있다. 기껏 산마루를 넘어봐야 더 높은 산이 가로막을 뿐이라고 바람 빼지 마라. 모든 걸 알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다. 모르는 게 약이요, 인생길은 오리무중이라서 더욱 매혹적이다. 안개 자욱한 길을 걷는다는 건 곳곳에 숨겨진 보물을 찾아가는 길일지도 모른다. 바위 밑이나 나무 그루터기에 숨겨진 보물들 찾는 보물찾기 같은 삶이다. 어차피 인생은 봄날의 걸판진 꿈이라는데 소풍처럼 살다 가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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