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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물꼬물

by 이봄


햇살 곱게 내려앉은 무릎에 깨알만 한 말들이 기어올랐다. 바지춤 주름진 골짜기를 따라 한 무리의 말이 꼬리를 물었고 등성이 훤한 길에도 고만고만한 놈들이 의기양양 깃발을 앞세웠다. 아양을 떠는 놈에 삿대질을 해대는 놈까지 실소를 자아냈지만 짐짓, 모른 척 딴청을 피웠다. 부러 먼 산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턱을 바짝 치켜들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하던 짓을 멈출 것만 같아서였다. 힐끗힐끗 훔쳐보는 재미가 제법이어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 사는 모양새가 그렇듯 드잡이로 언성을 높이는 날에는 핏발 선 말들이 고개를 쳐들었고, 떡이라도 하나 생긴 날에는 말랑말랑 보드라운 말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입을 벗어난 말들은 저들끼리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마당 주변 작은 터에는 꽃이 피었고, 꽃그늘 가만가만 들여다보면 깨알 같은 말들이 꼬물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 번 입을 벗어난 말은 공기 중에 흩어져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놈들도 질긴 목숨줄 꽁꽁 움켜잡고서 하루를 건너고 계절을 이겨내고 있었다. 가끔 귓속이 간지러우면 '어떤 놈이 내 욕이라도 하는가' 구시렁대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거였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말은 살금살금 귓구멍에 숨어들어 창끝을 세웠지만 상처를 내고 고통을 주는 데에는 역부족일 때 탄식 같은 간지럼을 남기는 거였다. 그러니 어떤 놈이 내 욕을 한 게 맞다. 억울하다 발을 구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욕먹을 짓을 했는지도 모른다. 귀가 간지럽거든 혹여나 하는 마음을 먹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말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모여 살았다. 향기로운 말들은 향기로운 꽃을 심고 가꾸는데 열심이었고, 사나운 말들은 뙤약볕에도 구슬땀을 흘리며 싸움에 몰두했다. 그들 곁에서 열심히 입방아를 찧던 녀석은 분명 남을 헐뜯고 분탕질을 일삼던 순간에 태어난 놈이 분명했다. 제 버릇 개에게 줄까. 서 푼어치도 못 되는 알량함을 유언처럼 손에 쥐고 살았다. 달 뜨면 개가 짖듯 말들이 사는 마을은 늘 시끄러웠다. 눈을 뜨면 쪼르르 개구진 말들이 마을을 깨우며 몰려다녔다. 그러다 까르르 배꼽이 빠져라 웃었다. 그런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녀석은 이내 침을 뱉으며 욕지거리를 쏟아냈다. 그나마 나이를 먹은 녀석들은 혀를 끌끌 차며 그러지 마라 타이르기도 했다. 온갖 말들이 섞인 마을은 그래서 시끄러웠고 어지러웠다. 해가 지고 꽃그늘이 어둠으로 바뀌고 나서야 겨우 평온을 되찾았다.

볕 좋은 날에 다리라도 꼬고 앉아 졸고 있으면 이때다 싶었던 말들이 다리춤을 기어올랐다. 손에는 저마다의 이름을 대신할 것들을 움켜쥐고 있었다. 꽃을 들었고 창을 들었다. 책 한 권을 옆구리에 낀 녀석이 있는가 하면 구린내를 풀풀 풍기는 놈도 있었다. 파리가 떼로 몰려와 호위를 했다. 눈앞을 얼쩡거리며 날아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지만 무슨 훈장이라도 되는 양 거들먹거렸다. 헐뜯기 좋아하는 녀석은 코를 틀어쥐고는 거들먹대는 녀석의 옆에 바짝 붙어서는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탓에 숨을 쉴 수가 없다며 험담을 늘어놓기 바빴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허허, 고놈들 노는 꼴이라니.... 끌끌 혀를 차다가 가슴이 뜨끔했다. 마냥 나무랄 수도 없었다. 어떤 놈인지 심장 근처에 파고들어 창을 찌른 모양이다. 고놈 참 재기도 하네! 웃고야 만다. 꽃그늘 향기로운 화단엔 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었고, 꼬물꼬물 깨알만 한 말들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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