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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빵

by 이봄


남자는 종일 죽은 것처럼 잠만 잘 테니 미리미리 알아서 조용할 것을 당부했다. 여자와 아이들에게 선전포고를 하듯 말을 남기고는 비몽사몽 꿈길을 거닐라치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아저씨들이 골목에 들어섰다. 큰길에서 벗어나 골목으로 접어드는 순간부터 카랑카랑 찢어질 듯 이어지는 아저씨의 목소리는 몇 년을 두고도 변하지 않았다.

"계란이 왔어요. 싱싱한 계란이 왔어요!"

아,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꾹 눌러 참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따라 하게 되는 그놈의

계라니는 정말 싱싱하기는 한 걸까. 분명 참하고 예쁜 암탉이 목욕재계하고 낳았을 터였다. 그러니 저렇게 쉰 목소리를 가다듬고서 자랑을 하겠지?

마침 계란이 떨어진 순이 엄마는 귀를 쫑긋 세우고서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확성기를 타고 흘러나오는 계라니가 채 얼굴도 내밀기 전에 반색을 하는 꼴이라니. 죽었던 친정 어미가 살아온 것만 같았다.

"아저씨? 여기요! 호호호. 오늘은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한참을 기다렸네...."

"아, 그게.... 오늘따라 암탉들이 알은 안 낳고 꽃단장이 길어져서요"

변죽 좋은 아저씨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받았고, 두 사람의 시답잖은 말이 길어질수록 그놈의 계라니는 바로 귓전에서 귓구멍이 얼얼하게 후벼 파고 있었다.

"저놈의 여편네는 계란이나 살 일이지 뭔 놈의 수다야 수다가...."

속이 시원하게 일갈을 퍼붓고 싶었지만 마음뿐이었다. 겨우 열린 창을 탁 소리 나게 닫는 게 전부였다.

"어디 그렇게 닫아서 문이 깨지겠어요? 더 세게 닫아야 와장창 유리라도 깨지지...."

잠만 잔다고 삐죽 입술을 내밀고 있던 여자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한 입 크게 물어뜯었다. 쌤통이다! 쾌재를 부르는 순간이었고, 호호호 뒤통수를 치는 반격의 순간이었다. 잔뜩 몰려왔던 졸음이 계라니와 함께 줄행랑을 놓았다. 번갯불에 콩을 볶는다더니 눈이 맞는 건 번개보다도 빨랐다.

물처럼 계라니 아저씨가 빠져나가면 골목은 이내 평온을 되찾았다. 간혹 몰려다니는 아이들의 재잘대는 소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면 그만이었다. 다시 소파를 끌어안고 뒹굴거렸다. 달아난 잠이 금방 찾아올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고 싶지도 않아서였다. 몸을 배배 꼬았다 풀기를 반복했다. 모로 누웠다가 바로 누웠다. 벽에는 빨간 양귀비꽃이 피었고 천장에는 불 꺼진 형광등이 졸고 있었다. 꽃송이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주리를 틀던 순간에 트럭 한 대가 골목에 들어섰다. 이름만 바뀐 익숙한 박자가 쿵짝쿵짝 박자를 맞췄다.

"생선이 왔어요. 팔딱팔딱 뛰는 싱싱한 생선이 왔어~~ 요!"

아, 이런 젠장.... 목구멍까지 욕이 기어올랐지만 겨우 참았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뭘 어쩌겠어. 도를 닦는 심정으로 욕지거리를 막아서고 있었지만 하필, 왜 오늘이야 하는 원망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고약한 날이었다.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으로 걷던 아이들은 답답했는지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기껏 아이들이 만들어준 고요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일진이 사나운 날이야 구시렁대다가 남자는 소파에 앉았다. 볼 것도 없는 텔레비전을 켜고는 신경질적으로 채널을 넘겼다. 시시껄렁한 이야기가 시큰둥 화면을 장식하고 있었고 남자는 이내 전원 버튼을 눌렀다.

"집이나 좀 보고 있어요. 장 좀 보고 올 테니.... 내 말 들었죠?"

고개를 끄덕였다. 골목은 다시 조용해졌고 아이들은 떼로 몰려다니며 오후 햇살을 쫓고 있었다. 정작 남자가 자리에 앉고부터는 더는 아저씨들의 방문은 없었다. 돼지를 싣고 와 판다고 해도 괜찮았고, 소를 팔아도 상관없었는데도 장사치들은 찾지 않았다. 골목의 고요에 심통이 났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삐그덕 문이 열리고 비닐봉지 몇 개를 들고 여자가 돌아왔다. 여자의 손에 들린 봉지에 눈길을 매고는

"일찍 왔네? 오늘 저녁엔 뭐 먹을 거야?"

말을 했고, 여자는 들었는지 어쨌는지 손에 들린 봉지 하나를 내밀었다.

"그만 심통 부리고 이거나 들어요"

당신 좋아하는 생선이에요. 호호호. 여자가 웃었다. 검은 봉지에는 생선 몇 마리가 말똥말똥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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