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포르투갈의 달

by 이봄


남자는 달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예나 지금이나 밤하늘에 곱게 달이 뜨면 넋 놓고 바라보곤 했다. 물론 나이를 먹으면서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커진 건 사실이지만 어렸을 때에도 다르지 않았다.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른다. 그냥 네가 좋듯 달도 마찬가지다. 멍하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연한 미소가 번지고 시간을 잊게 만들었다.

그때도 그랬다. 까미노를 준비하며 리스본에 머물 때 달을 만났다. 새벽에 일어나 숙소 뒷마당을 서성거리다가 마주한 달은 정말 고왔다. 곱다는 말로 두리뭉실 넘기기엔 말이 부족했고 마음은 찜찜했다. 안개가 끼었는지 달은 몽환적인 느낌이었고 그게 너무도 비현실적인 모습이라 오히려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달을 둘러싼 동그란 달무리는 아름다웠다. 판타지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장면에 넋을 놓았다.

안평대군이 꿈에서 보았다는 복사꽃 핀 풍경은 안견을 만나 몽유도원도로 남았다. 한낱 꿈의 기억이 얼마나 황홀하고 강렬했으면 그림으로라도 남기고 싶었을까. 피워 물었던 담배를 비벼 끄고는 핸드폰을 찾아 꺼내 들었고 몇 장의 사진을 연거푸 찍었다. 별도의 카메라가 없으니 다른 선택은 없었다. 선명한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그 느낌의 작은 조각만이라도 사진에 담겼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바람은 그저 바람으로 불었다. 그 밤의 달무리는 남자에게 몽유도원도와 같은 달무리였다.

많은 길을 만났고 많은 시간을 길 위에서 보냈다. 길이 많고 시간이 길었던 만큼이나 많은 사람을 만났다. 어설픈 대화였지만 이야기도 몇 꾸러미는 채웠을 터다. 이름 모를 마을을 지났다. 풍경으로 스친 마을은 그보다 몇 곱절은 많았을 테고 거기에 깃들어 사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길을 걷는 여행자에게 길에서 벗어난 것들은 풍경이었다. 어찌 일일이 나열하고 얘기할 수 있으랴. 다만, 가슴에 남고 머릿속에 부유하는 기억의 파편으로 남길 수밖에 없다. 여행의 기억이란 그런 게 맞을 거였다. 그래서 기억에 담을 수 없는 이야기들은 사진으로 남기게 마련이다. 사람의 기억은 그만큼 유한하고 편협하다. 특정한 기억이 아니라면 가차 없이 지웠고 망각했다.

손에 들린 핸드폰에는 1,300여 장의 사진이 남았다. 그리고 여기 배낭에서 꺼낸 돌멩이 하나가 남았다. 리스본에서 시작된 길을 걷고 또 걸어서 포르투를 지나고, 또 며칠을 더 걸어서 스페인과 맞닿은 국경에 가까이 왔을 때, 돌 하나 주워서 가방에 담았다. 리스본의 새벽에 만났던 달무리 곱던 달을 온몸에 새긴 돌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평범한 돌멩이에 불과할 터였지만 어쩐지 남자의 눈에는 그렇게 달을 품은 돌로 보였다. 자갈밭에 뒹굴던 돌멩이 하나 눈에 띄었을 때 가슴이 설레었다. 들꽃 한송이, 돌멩이 하나라도 제자리에 있어야 함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욕심이 앎을 넘어서니 결국은 이렇게 모셔오고야 말았다.

틈나면 손에 쥐고서 만지작만지작 돌을 만졌다. 밤하늘의 달이야 그저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지만 손바닥에 곱게 뜬 달은 수시로 어루만질 수 있어 좋았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촉감이 좋았다. 마치 안개를 곱게 두른 달처럼 달무리로 빛났다. 달은 그랬다. 잊히는 기억을 하나씩 불러내어 다시금 생명의 온기를 불어넣었다. 조금 더 추억을 들춰 지난날의 나를 만날 수 있게 다리를 놓았다. 늙은 매파였고 까마귀와 까치가 만든 오작교였다. 애틋한 첫사랑의 기억처럼 추억을 부르는 이국의 달을 보다가 남자는 이름 하나 지었다. '포르투갈의 달'이라 이름을 붙였다. 제법 그럴싸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붕어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