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골짜기를 떠돌다 예서 눈에 갇혔을까? 빈 들에 허허롭게 바람 불면 그리움 깊다 했다. 단풍이 지듯 곱던 너의 말도 퇴색되어 바스락거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내놈은 기껏 한다는 말이 가을엔 떠나지 마라! 애원을 했다. 낙엽 뒹구는 거리를 홀로 걸을 자신이 없다고 어깨를 들썩였다. 가을이 몸서리치고 있었다. 숲을 채워 노래하던 이파리는 마지막 불꽃 붉게 피워내고는 낙엽으로 뒹굴었고, 귀 따갑게 지저귀던 새들은 깃털을 다듬어 숲을 떠났다. 다람쥐는 마지막 남은 햇살에 기대어 종일 종종거렸다. 두 뺨이 볼록하게 도토리를 주울뿐 그 무엇에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 그만큼 이별은 가까웠고 해는 짧았다. 봄날의 화려함과 여름날의 열정은 가을 햇살에 곱게 피었다가 낙엽으로 뒹굴었다. 화려하고 뜨거웠던 만큼이나 깊게 파인 쓸쓸함으로 떨어졌다. 가을은 짧았지만 쓸쓸해서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참나무 삭정이에 내려앉은 햇살도 어쩐지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울지 마라. 섣불리 위로의 말을 건넬 수도 없었다. 어쭙잖은 말은 오히려 겨우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게 할게 뻔해서였다. 쓸쓸하고 외로운 것들이 바람에 떠돌았다. 마치 흉흉한 소문에 입을 꾹 다문 것처럼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제 할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가을은 그래서 이별이 숲에 가득했지만 막상 이별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쓸쓸하고 외로운 시간이었다.
지붕 가득 쌓였던 눈이 녹았고 마당 한 끝에 얼어붙었던 낙엽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이별의 말을 잔뜩 매달고 가을을 건넜을 터였다. 몇 됫박의 눈물을 쏟던 연인은 지금도 가슴앓이로 밤을 지새우고 있을까? 꺼억꺼억 짐승처럼 울었다. 몸부림은 거칠었고 쏟아내는 말은 날카로워서 상처를 냈다. 붉은 단풍이 또르르 피었다. 사나운 말은 피해야만 했다.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은 될 수 있으면 꾹꾹 눌러두었다가 겨울에 쏟아내야만 했다. 계절이 바뀌고 까만 하늘에 툭툭 눈송이 불거지면 말은 이내 하얗게 지워졌다. 깊은 흉터로 남았을 말들은 심하게 발버둥 치겠지만 함박눈 소복이 쌓이면 꿈꾸듯 잠들지도 몰랐다. 토닥토닥 등을 토닥이며 애썼다, 애썼다. 굳이 입술을 달싹여 말하지 않아도 좋았다. 죽은 듯, 잠든 듯 나목으로 바람을 맞아도 좋았다. 할퀴듯 불어 가는 바람엔 사람의 그것보다 많은 말들이 들러붙어 불어 가는 짧은 순간에도 위로하고 용기를 주었다. 허투루 뒹구는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다. 수시로 불어 가는 바람도 그랬고 하얗게 내리는 눈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의 발에 밟혀 바스락 부서질는지 알 수 없는 낙엽 하나에도 이야기는 매달려있었다. 아, 이렇듯 계절을 건너고 세월을 짊어진다는 건 쓸쓸한 거였다. 수수 백 번 핥아 털을 말리는 어미의 수고로움처럼 찢어지고 다시 봉합되는 과정이 그 잘난 사는 거였다. 수 없이 혓바닥으로 핥고서야 겨우 마르는 털처럼 한 번 상처 난 것들은 하루가 고단해야 겨우 붙었다. 그러니 고작 뒹구는 낙엽 하나에도 매달려 통사정을 했고, 나풀거리는 눈송이에 기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얀 겨울에 떠난 연인은 그나마 덧나지 않은 상처에 금방이라도 새살이 돋았을까 모르겠다. 길가에 쑥 한 움큼 잘라다가 돌멩이로 곱게 짓이겨 붙였을 상처는 겨울을 건너는 동안엔 눈으로 씻고 꿰매 다독였다 했다. 눈에 갇혀 떠돌지 못했던 낙엽이 바람에 팔랑거렸다. 몇 번의 햇살 내려앉으면 그대 떠난 그 길을 따라 뒹굴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