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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by 이봄

늙은 산벚나무 그늘 좋게 드리우면 남자는 평상에 벌러덩 누웠다. 나뭇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이 언뜻언뜻 보였고 그 틈새만큼 햇살이 반짝였다. 초록의 이파리들은 떼로 매달려 바람에 흔들렸다. 적당한 햇살과 그림자가 만든 세상은 까박까박 졸음을 불렀다. 눈을 감았다. 그가 눈을 감았을 때 바람이 불었고 얼굴에 내려앉았던 그림자가 화들짝 놀랐다. 졸고 있던 남자에게 장난이라도 치는 듯 나뭇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그림자와 햇살이 번갈아 내려앉았다 도망쳤다. 남자는 눈을 찡그렸다. 실눈으로 파고드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질끈 눈을 감았다. 실 같은 햇살도 허용할 수 없다는 듯 힘을 주었다. 가볍게 부는 바람이 얼굴을 만지고 지나갈 때에 솜털처럼 가볍던 얼굴에 커다란 돌덩이 하나 올려놓은 것처럼 얼굴이 무거웠다. 그렇게 생각했다. 바람은 가볍고 햇살은 무겁다고 생각했다. 바람은 깃털이었고 햇살은 돌덩이였다. 눈에 힘을 잔뜩 주었을 때 얼굴은 분명 무거웠다. 감은 눈으로 햇살이 붉게 번졌다. 술래잡기라도 하듯 눈꺼풀 위에서 햇살이 뛰놀고 그림자가 어른거릴 때 하늘은 붉었다. 선홍색 하늘이 정말 곱다 생각했다.

발을 까딱거렸다. 세운 무릎에 발을 올려놓고는 장단에 맞춰 까딱거렸다. 오락가락 그네를 타듯 햇살이 물비늘로 반짝거렸고 바람은 신이 나서 등을 떠밀었다. 남자는 산벚나무 그늘에 누워 한껏 게으름을 피웠다. 바람은 짓궂었고 햇살은 귀염을 떨었다. 옆으로 밀려난 졸음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잔뜩 심통이 난 모양이었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세수라도 하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리고는 움켜쥔 손을 주머니로 가져갔다. 주섬주섬 주머니 속에다 햇살 한 줌을 넣었다. 옆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던 바람도 냅다 움켜쥐고 주머니 속에 넣었다. 달아나고 나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거 같아서 서둘러 잡았다. 되새김질하기 좋은 날이면 뒤적뒤적 햇살을 꺼내고 바람을 불러내고 싶었다. 한 무릎을 세우고 다리를 포개 발을 까딱거리면 햇살은 다시 붉게 반짝거릴 터였고 바람은 그네를 밀겠다 싶었다. 평상 하나 그늘에 품은 나무는 한가롭게 졸 터였다. 여기저기 흩어진 햇살과 하릴없이 떠돌던 바람이 주머니 속에서 꼼지락거렸다.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던 친구 녀석의 말이 떠올라 싱겁게 웃었다. 그때도 그랬을까? 한적한 길을 따라 걷고 있었고 나무 허리에 햇살이 걸렸던 기억이 있으니 오후였다. 안부를 물었고 날씨가 어떻고 사는 게 저렇다는 둥 하루를 얘기하다 그가 그랬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니 팔자가 오뉴월 개처럼 상팔자구나!"

위로인지? 아니면 끌끌 혀를 차는 비아냥인지 헷갈렸다. 하는 일 없으니 속은 밴댕이처럼 좁아터지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그나마 속이 편했다. 그래, 내가 밴댕이 속이다 했다.

일을 할 수 없어 백수가 됐을 때 남자는 남아도는 시간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아무리 내다 버리고 땅에 묻어도 툭툭 불거져 발에 차였다. 파시를 이루던 포구의 개는 만 원짜리 한 장 입에 물고 다녔다 했듯 남자의 마당에선 개가 시간을 물고서 잠이 들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니 오뉴월 개 팔자가 꼭 틀린 말은 아닌 거 같네"

들릴 듯 말 듯 남자가 중얼거렸다. 여기저기 흩어진 햇살을 주웠고 달아나는 바람을 붙들었다. 그루터기를 기어가는 돌나물도 마디 하나씩 키워내며 바람을 붙들고 햇살을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그렇게 하루가 쌓였고 초록의 이파리는 그루터기를 채웠다. 하릴없는 바람이 불 때 남자는 주머니 가득 시간을 주워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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