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면 안개가 숲에 깔렸다. 사람의 키를 넘지 못할 만큼 납작 엎드린 안개는 베갯닛에 달라붙은 졸음처럼 몽환적이었다. 뿌리도 없이 둥둥 떠다니는 나무들 밑으로 물처럼 고였다. 바람결에 출렁거렸지만 조용했고 바위에 부서졌지만 요란하지 않았다. 동트기 직전의 숲은 그래서 조용했다. 눈치 없는 산새가 아니었다면 새벽은 멀었고 오히려 깊은 밤이었을 터였다.
사흘이 멀다 하고 숲에 안개가 낀다는 건 능선 너머에 봄이 밀려들고 있음을 뜻했다. 부쩍 새들이 수다스러워진 것도 그렇고 가지마다 툭툭 불거진 꽃눈을 봐도 그랬다. 속으로만 파고들던 숨결이 마침내 방향을 틀어 기지개를 켰고 눈꺼풀에 들러붙은 졸음을 내쫓고 있는 거였다. 갑옷처럼 둘렀던 꽃눈의 껍데기가 툭툭 갈라졌고 그 사이로 뽀얀 솜털이 보였다. 굳이 귀를 가져다 대지 않아도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봄이 오고 있었다. 멀지 않은 산마루 너머에는 삼삼오오 모여든 봄이 신발끈을 동여매고 있는 모양이다. 그들이 토해내는 숨이 새벽 숲에 안개로 깔리고 있었다.
한두 번의 추위가 남아 안개를 걷어내고 다시금 칼바람을 몰아갈지도 모르겠다. 꾸물꾸물 하늘이 몸서리치면 펑펑 눈을 쏟을지도 모르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고, 기운 판세를 뒤집을 힘은 누구에게도 있지 않았다. 시샘이란다. 이름이 바뀌고 입방에 오르기 시작했을 때 겨울의 매서움은 꼬리를 감췄다. 꽃을 시샘한다 조롱했다. 길바닥에 벌러덩 누워 발버둥 쳤다. 물러나는 장군은 한낱 아이의 어리광을 짊어지고 있었다.
봄이 일어섰다. 그러니까 어디 멀리로 달아났다 돌아온 봄이 아니었다. 숨죽여 엎드렸던 몸뚱이에 잔뜩 힘을 주고는 보란 듯이 일어서는 게 봄이었다. 나무가 일어섰고 마른 풀포기를 헤치며 새 움이 일어섰다. 소나무며 잣나무 가지에 매달린 이파리들도 겨우내 묵은 떼를 바람에 씻었다. 햇살 반짝이면 덩달아 바늘 같은 솔잎이 반짝거렸다. 쏴아 함성으로 몰려가는 바람은 또 어떤가. 그것은 마치 대양으로 출렁대던 바다가 마침내 육지를 만나 뭍으로 기어오르는 파도처럼 거침이 없었다. 주저하거나 망설이지도 않았다. 서로를 잡아끌고 등 떠밀었다.
마른 꽃 하나 바람에 흔들렸다. 검게 마른 줄기에 잔가지 몇 개 삐죽 돋아 꽃송이 하나씩 받쳐 들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꽃은 아니다. 꽃받침만 앙상하게 남은 지난가을의 흔적이었다. 꽃잎을 떨구고 씨앗마저 다 바람에 날리고서도 꽃은 마른 줄기 꼿꼿이 세우고서 여기 꽃이 피었었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이름이 뭘까? 뜯어보다가 이내 머리를 저었다.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어떤 이름을 가진 들풀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모르는 것을 구태여 알고 싶지도 않다. 이름이 없으니 그저 잡초라 뭉뚱그려 말한다 해도 서운할 것도 없겠다 싶었다. 매서운 바람이 불었고 한 짐의 눈이 내려 쌓였다. 머리에 인 눈이 녹는 데에는 꼬박 한 계절이 다 필요했다. 길고 지루한 모진 시간이었다. 그 끝자락에 대단한 영광이 기다릴 일도 없었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이 밝았고 오늘과 다르지 않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렇다고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어머 세상에나.... 이런 꽃이 다 있었네? 앙증맞기도 해라. 너무 귀엽네"
호들갑을 떨며 걸음을 멈췄던 그가 한참을 요목조목 뜯어보다 떠났을 때는 늦여름이었다. 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햇살은 따가웠다. 가을이 오고 있었으므로 날갯죽지가 뻐근하도록 날아야만 하는 벌처럼 들풀의 하루도 바쁘기는 매한가지였다. 종종거렸다. 풀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로 목을 축여가며 씨앗을 만들고 바람에 흩뿌렸다.
지난가을이 얼마나 황홀하고 대단했는지 자랑하고 싶었을 터였고 기억해줬으면 하는 소망을 빌었을지도 모른다. 부는 바람에 매달아 날려 보낸 말들이 또 얼마나 많았을까. 허리를 숙여 들어주었다. 한 무릎을 꿇고는 바스락대는 줄기도 어루만졌다.
"기억할게! 너의 가을은 정말이지 대단했을 거야. 지금의 너도 그런 걸 보면 분명 그래"
새끼손가락 내밀어 약속을 했다. 그러니 너의 이름을 모른다고 서운해도 마라. 잡초니 뭐니 하는 말에는 귀를 닫아도 좋았다. 마른 꽃송이 하나 겨울을 이겨내고 마침내 봄이 일어서는 날에 향기롭게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