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뿔

by 이봄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로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걸음걸음에 와르르 무너지는 내가 있다는 거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과 그래서 따라붙는 삐걱거림은 늘 쌍으로 움직이고, 그것들을 멀뚱이 바라봐야만 하는 나는 한숨을 쉬게 마련이고....

앓았다. 이 계절이면 늘 들불처럼 몰려가는 감기였는지 아니면 몇 해를 두고 세상을 어지럽힌 고놈의 역병이었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온몸에 열이 오르고 근육통은 뼈 마디마디를 대바늘로 찌르는 것만 같았다. 약을 먹으면 나은 듯하다가도 약기운이 떨어지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며칠을 꼬박 앓고서야 겨우 삐걱거리던 몸뚱이는 정신을 차렸다. 이레가 걸렸다. 약을 먹으면 낫는 데 칠 일이 걸리고, 그렇지 않으면 일주일을 앓아야만 한다더니, 정말 이레를 다 채우고서야 겨우 모진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약한 놈을 정말 고약하게 겪었다.

바람이 빠졌다. 잔뜩 부풀었던 풍선이 바람이 빠지면 쭈글쭈글 볼썽사납 듯 가뜩이나 볼품없는 사내가 한 됫박 무너졌다. 비타민이 부족하면 걸린다는 각기병처럼 한 번 눌린 것들은 제 모양을 찾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몇 날 며칠이 흐른 뒤에라도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인 세월이다.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낙오되는 것들이 길에 널브러졌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때가 되면 걸쳤던 옷들 하나까지도 벗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두꺼운 외투를 벗을 터였고, 팔목에 둘렀던 팔찌를 팽개칠 터였다. 애지중지 아꼈던 물건도 마찬가지다. 하나씩 둘씩 버려지는 것들이 늘어나면 결국 길 위에 선 나그네는 벌거벗은 그림자 하나 동무 삼으려는지도 모르겠다.

감기를 떨어내고 알량한 말 하나 불러내는 데에 또 그만큼의 시간이 걸렸다. 서쪽 하늘에 떴다 이내 저무는 초승달이 동쪽 하늘에 휘영청 보름달로 떴다. 달이 뜨고 지는 걸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 구름이 지나갔고 싸라기눈이 얼굴을 때렸다. 개가 짖었고 닭이 새벽이면 울었다. 울지 않던 멧비둘기가 구구구구 울었다. 봄이 오는 모양이다.

말 하나 불러 세웠다. 손에 잡히지도 않는 것을 겨우 꼬드겨 곁에 앉히고는 횡설수설 주정 같은 말을 뇌까린다. 꼭 말이란 게 알맹이가 있어야만 하고, 뼈 하나쯤 숨겨야만 하는 건 아닐 테니까. 주절주절 바람 같은 말을 쏟는다. 어쩌면 그래서 바람 빠진 풍선에 거꾸로 바람이 들려는지도 모른다. 탱글탱글 또랑또랑한 것까지야 바랄 수도 없겠지만 헛소리라도 쏟아낼 만큼의 바람이라도 찼으면 하는 바람을 앞세웠다. 기대하는 것조차 하나 없다면 비둘기 우는 봄날이 얼마나 허망할까.

생강나무 알싸하게 꽃망울을 터트리면 비로소 봄날이 열렸다. 겨우내 움츠렸던 것들 슬금슬금 고개를 쳐들고 얼었던 몸을 녹일 터였다. 납작한 꽃다지가 제일 먼저 고개를 쳐들면 뒤따라 냉이며 달래가 아지랑이 피어나듯 몸을 풀 터였다. 시끄럽고 분주한 계절에 나는 또 한껏 한가로운 걸음으로 마당을 서성이다가 킁킁 냄새를 맡을지도 모른다.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찌르고 그만큼 익숙한 것들이 시선을 잡아끌면 나는 못 이기는 척 딴청을 부리며 봄날의 잔칫상에 앉을 거였다. 그거면 됐다. 주렁주렁 요란한 것들 매달고 걷는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거추장스럽고 힘겹다. 귓전을 울리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시끄럽고, 여간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게 아니다. 애써 바라는 것도 없다지만 그나마 부스러기 하나 매달려 시끄럽거든 툭툭 떨어내고 볼일이다.

남은 것 없어 입이 궁금하고 못내 아쉽거든 그림자 하나 곁에 앉히고서 주거니 받거니 떠드는 말들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마치 봄꽃이 피듯 소리도 없고 몸짓은 정갈해서 어지럽지도 않을 거였다. 게다가 툭툭 터지는 꽃망울이야 봄이 다 가도록 바라본다고 해서 물리는 것도 아니니 바라봄도 나쁘지 않겠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졸다 깨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봄날은 이미 찬란할 터다. 행여 불어 가는 봄바람이라도 마당에서 만큼은 자분자분 걸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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