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잠을 깬 건 순전히 허벅지가 간지러워서였다. 콕콕 바늘로 찌르듯 따끔거리는 것과 간질간질 간지러운 게 구별되지 않는 새벽은 조용했다. 숨소리조차 천둥처럼 느껴지는 시간에 남자는 이불속을 빠져나왔다.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는 새벽 찬바람이 어슬렁 대는 마당으로 나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직 어둠이 물러나지 못한 마당은 캄캄했다. 그 캄캄한 새벽을 날아와 눈이 쌓이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어둠만 가득했을 뿐 무엇 하나 보이지 않았다. 거꾸로 매달린 바다가 연신 흰 눈을 토해내고 있었다. 뺨에 눈이 내려앉았다. 앉은 눈은 이내 녹아 차갑게 흘렀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이 입술 끝을 파고들었다. 싱거웠다. 분명 바다에서 시작된 바람이 눈이 되었을 텐데 눈은 싱거웠다. 겨울의 얼얼한 매움도 없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시작됐는지를 까맣게 잊은 눈이 새벽처럼 물끄러미 쌓였다. 어쩌면 잊어서 싱거운 게 아니라 무기력함이 불러온 자포자기의 심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개 하나만 넘으면 모여든 봄이 웅성거리고 있었고 골짜기로 밀려난 겨울은 퇴각을 준비하느라 야단스러운데 어느 틈을 파고들어 발톱을 세울 수 있을까 싶었다. 풀 죽은 겨울이 봄비처럼 나풀나풀 쌓였다.
차창에 쌓인 눈에 그녀의 이름을 썼다. 유리에 맞닿은 면이 녹아서 그런지 손가락에 밀린 눈이 흘러내렸다. 이름 하나 뜻대로 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 겨울의 마지막 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애써 이름을 쓰고 사진을 찍었다. 싱겁게 쌓인 눈 위에다 그보다 더 싱겁게 남자는 그녀의 이름을 쓰고는 피식 웃었다. 겨울이 시작되던 날 그런 생각을 했었다. 소담스럽게 눈 내리면 눈 위에 그녀의 이름을 쓰고는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얘기해 줘야지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겨울이 물러나는 끝자락에서야 겨우 이름을 썼다. 끝물의 눈은 생각처럼 소담스럽지도 못했다. 울며 겨자를 삼켰다. 눈물이 핑 돌았다.
겨드랑이가 간질거렸다. 날갯죽지는 뻐근해서 움찔움찔 놀랐다. 그렇지만 숨 한 번 크게 쉴 수가 없었다. 사내는 벽장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고 그의 아내는 벽장 밖에서 숨을 헐떡였다. 한낮의 사랑이었다. 한동안 거친 숨소리가 벽장 밖 방안에 가득 들어차고 있었고, 사내는 그럴수록 입을 틀어막고는 새어 나오는 숨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두 눈을 감았다. 두 손으로 잔뜩 귀를 막고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실눈처럼 뚫린 벽장 틈으로 연신 거친 숨소리가 파고들었고, 그녀의 가쁜 몸짓이 출렁거렸다. 그럴 때마다 사내는 겨드랑이가 간지러웠다.
더는 물러날 곳도 없는 벽장 안에서 사내는 더 깊은 어둠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고 꿈을 꾸었다. 간질거리던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았다.
눈부신 하늘을 날았다. 하늘처럼 파란 바다 위를 날았다. 날개를 한껏 퍼덕이다가 끼룩끼룩 갈매기처럼 울었다. 그러다가 어느 들꽃 흐드러진 초원에 내려 거칠게 사랑을 나눴다. 코끝을 파고드는 그녀의 살냄새가 아찔했다. 벽장에서 벗어난 그는 거침이 없었다. 고래고래 고함도 내질렀고 우악스럽게 그녀의 가슴도 움켜쥐었다. 간질거리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났을 때 마침내 사내는 말 하나 끄집어냈다. 애써 지우려던 말이었고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말이었다.
"나, 당신 죽도록 사랑해!"
아, 이런.... 여전히 당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의 말에 놀라 잠을 깼다. 그러면 그렇지 꿈이었구나! 미간이 찌푸려지고 어깨는 처졌다. 벽장 밖은 조용했다. 벽장에 귀를 대고 밖을 살폈다. 사랑의 시간은 끝이 났고 뜨겁던 남녀는 밀물처럼 빠져나간 모양이다. 사내가 벽장문을 열고 나왔을 때 요와 이불은 심하게 어지럽혀져 있었고, 베갯머리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담배 한 갑과 구겨진 지폐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분냄새가 훅 하고 코를 파고들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주삿바늘이 파고드는 허벅지는 그만큼이나 수시로 간질거렸다. 그렇다고 벅벅 소리가 나도록 긁을 수도 없었다. 기껏해야 할 수 있는 건 소독용 솜으로 가려운 부위를 닦아내는 게 고작이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부슬부슬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그리웠다. 내리는 눈처럼 사랑한다 속삭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름을 쓰고 있을 때 자동차 하나 신작로를 달려가고 있었다. 남자는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어쩐지 겨드랑이가 간지러웠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까무룩 잠든 사내는 오늘도 하늘을 날고 바다 위를 날다가 봄꽃 예쁜 들에서 사랑을 나눌 터였다. 비록 꿈일지라도 그럴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