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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라오

by 이봄


선 하나 그어놓고 계집애나 사내놈이나 가자미눈을 치켜뜨고 내려 뜨고 야단을 떨었다. 가뜩이나 좁아터진 책상이 두 동강이 나던 날에 찬바람은 또 어찌나 몰아치던지 벌겋게 달아오른 난로가 부끄러워 뒷걸음질 쳤다. 무에 그리 분했던가 계집애는 연신 콧바람을 쏟아내고 괜스레 민망한 사내놈은 머리만 긁적였다.

쌩쌩 찬바람이 불었다. 왁자지껄 소란스럽던 교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고 장난기 넘치던 친구 놈은 까치발로 조용조용 걸었다. 겨울이었다. 새까만 조개탄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던 난로가 입을 다물었다. 애꿎은 도시락만 속을 새까맣게 태웠다.

"얘? 지금부터 이 선을 넘어오면 절대 안 돼! 알았니?"

쾅쾅! 그은 선 위에 계집애가 못을 박았다.

주뼛주뼛 시간이 흘렀다. 뭐 때문에 화가 났을까 고민을 해봤지만 뾰족한 답은 찾지 못했다. 까맣게 탄 밥을 꾸역꾸역 먹은 탓이었을까 속이 답답했다. 입은 근질거렸고 선을 넘지 못하는 팔꿈치는 저렸다.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 조급함에 가슴이 벌렁거렸다.

그게 잘못이었는지 모른다. 궁금해서 답답했던 것과 답도 모르면서 입을 뗀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잘못이었다.

"순이야? 미안해...."

기껏해야 그 말을 하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했고, 그만큼의 시간도 필요했다.

"뭐가 미안한데.... 얘기나 한 번 들어보자"

계집애는 빤히 사내놈을 째려보면서 얘기했다. 얘기나 한 번 들어보자는 말에 사내놈은 온몸이 얼어옴을 느꼈다. 더 이을 말도 없었고 애초에 뭐가 미안한지도 몰랐다.

"넌 그게 문제야. 아니? 뭐가 미안한지도 모르면서 얼렁뚱땅 미안하단 말로 눙치려는 거 그게 문제야. 알겠니?"

아, 머리가 띵했다. 둔탁하게 머리를 두들겨 맞은 느낌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선을 넘었구나 후회를 했다. 넘지 말았어야 했다. 애써 모르는 것을 앞세워 미안하다 얘기하는 게 아니었다. 계집애의 말은 옳았고 사내놈의 말은 잘못이었다. 가뜩이나 언 가슴에 물을 끼얹는 꼴이었다. 미안하다는 짧은 말로는 언 마음을 녹일 수는 없었다.

울그락 푸르락 얼굴이 화끈거렸다. 책상에 그어진 선 위로 선 하나를 포개 그었다. 칼바람 몰아치는 겨울이 그나마 포근하다 싶었다. 어차피 긴 겨울의 끝에는 봄이 매달려있었으므로 애써 조바심을 태울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얼렁뚱땅 겨울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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