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아침을 먹은 남자는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을 깎았다. 며칠이나 자랐는지 구레나룻에서 턱으로 이어진 수염은 남자를 더욱 초췌하게 만들었다. 거울에 비친 남자는 그래서 몇 살은 더 나이를 먹어 보였고, 어디가 아프구나 지레짐작하게 만들고 있었다. 문밖으로 나갈 일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면도를 한다거나 웃자란 머리카락을 자른다거나 하는 것에서 멀어져 있었다. 골짜기에 틀어박혀 자연인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외모가 거기서 거기인 까닭과 다르지 않을 터였다. 거울이 뚫어져라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낯선 얼굴이 거울 속에서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민망하기도 했고 반대편에 선 남자가 안쓰러웠다. 비누거품이 잔뜩 묻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썩 내키는 외출은 아니었지만 계속 뿌리칠 수만은 없었다. 한 번 다녀가라는 동생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걸음을 하는 거였다. 때 빼고 광을 냈다. 추레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뜨거운 물에 몸을 씻고 면도 하나 했다고 해서 없던 광채가 날 일도 없겠지만 나름 신경을 썼다. 주섬주섬 옷가지며 약을 챙겼다. 약의 힘을 빌어 하루를 산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제일 중요한 짐이 약보따리였다. '빼먹은 건 없겠지?' 머릿속으로 챙겨야 하는 것들을 하나씩 지워가며 재차 확인을 했다. 냉장고에 든 인슐린만 나가기 직전에 챙기면 되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주머니를 뒤졌다. 오른쪽 주머니엔 묵직하게 스마트폰이 만져졌고 왼쪽 주머니엔 담배와 라이터가 있었다. 왼쪽 가슴부위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을 때 지갑도 만져졌다. 빼먹은 건 없구나 다시 확인을 했다. 나이를 먹었구나 하고 인정하게 되는 것 중 하나가 그놈의 건망증이었다. 단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생각하고 있던 것을 까맣게 잊고야 말았다. 고향 마을에도 까마귀가 보이지 않는 까닭은 분명 사람들이 다 잡아먹은 탓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남자의 동생이 남자를 반겼다.
"오빠 왔어요? 운전하는데 힘들지는 않았고...."
반갑다고 이어지는 수다가 주렁주렁 박처럼 매달렸다. 달포만에 보는 얼굴이니 그다지 오랜만에 보는 것도 아닌데 수다가 길다.
"응, 길도 막히지 않았고 컨디션도 나쁘지 않아 좋았어. 넌 잘 지냈니?"
인사 끝에 약은 잘 챙겨 왔냐?'며 묻는 말에 남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확인을 한다고 했으니 고개를 끄덕이는 게 당연했다. 신발을 신으면서도 뭐 빠진 건 없는지 머릿속으로 확인을 했다.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좋았다. 도마 소리도 경쾌했다. 날카롭게 날이 선 칼은 사각거리며 무언가를 바삐 썰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는 풍경은 가벼워서 좋았고 귓전을 파고드는 소리는 장단을 맞춰 흥을 더하고 있었다. 침대에 비스듬히 기댄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연신 김을 뿜어내던 압력솥은 달그락달그락 김을 빼내는 밸브를 돌려댔다. 마치 몇 발의 긴 끈을 자유자재로 돌리는 상모꾼처럼 고갯짓이 제법이었다. 눈을 감고 소리를 들었다. 왁자지껄 사람들이 웃었고 목청을 돋웠다. 흥이 오른 사람은 어깨를 들썩였다. 골짜기마다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반가움에 안부를 물었고 국밥집을 차지하고 앉은 사내들은 탁배기 잔을 부딪히며 벌겋게 취기를 불렀다. 한 순간 사람들로 가득 찬 장마당이 눈앞에 펼쳐졌다. 시끌시끌 먼지가 일었다. 부는 바람에 옷걸이에 매달린 옷가지들이 춤을 추었다. 알록달록 환한 햇살이 꽃처럼 피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남자가 눈을 떴다. 발치에 두었던 가방을 끌어당겨 애지중지 챙겼던 약보따리를 꺼내 작은 탁위에 펼치기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 먹어야 하는 약봉지를 꺼냈고 소독용 솜이며 주삿바늘이 담긴 종이 박스도 꺼냈다. 위산제게제도 한쪽에 꺼내놓았다. 팔딱거리던 심장이 멈출까 싶어 먹어야만 하는 심장약도 빠질세라 아는 체를 했다. 하루동안 먹어야 하는 약이 많기도 하다 구시렁대다 말고 손을 멈췄다. 아뿔싸,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벌써 눈에 띄어도 띄었어야만 했고 손에 잡혀도 진작에 잡혔어야만 하는 인슐린이 눈에 띄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가방 구석구석을 뒤졌다. 작은 주머니 하나 빼놓지 않고 뒤지다가 마침내는 옷가지를 탈탈 털어도 보았지만 인슐린은 찾을 수 없었다. 낭패였다. 한심해서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재차, 삼차의 확인이 무색하게 끝내 인슐린은 없었다. 건망증의 승리였고 억울하게 죽어간 까마귀들의 역습이었다. 밥상이 차려지고 있었지만 남자는 다시 가방을 둘러메고는 동생을 향해 입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