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놈의 주둥이는 두었다가 밥 처먹는데만 쓴다든? 빙빙 맴맴 무슨 매미새끼도 아니고 밤낮 맴돌기만 하고.... 에라이.... 멍청하고, 미련맞고, 느려터진 곰탱이 놈아!"
험상궂은 얼굴로 따따부따 말을 쏟아내더니 계집애는 홱 하고 몸을 돌려 달아났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사내놈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머리를 긁적였다. 요 며칠 뭐에 심통이 났는지 눈만 마주치면 사나운 말만 골라 밉상을 떨었다. 그것도 애써 산길을 걸어와서는 제 할 말만 냅다 쏟아내고는 엉덩이를 씰룩이면서 달아났다.
요놈은 이렇고 고놈은 그렇다고 차근차근 말로 설명을 할 것이지? 소나기처럼 퍼붓기만 하면 뭘 어쩌자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계집애 성깔머리 하고는.... 너야말로 고놈의 주둥이는 잔소리할 때만 쓴다더냐?"
한바탕 쏟아붓고 달아난 소낙비에 생쥐꼴을 하고 앉은 사내놈이 내민 입을 이죽거렸다. 개미들이 바삐 오갔다. 겨우내 무너진 굴을 보수라도 하는지 모래를 문 개미들이 연신 들락날락 분주했다. 무슨 심통인지 흙을 한 움큼 움켜쥐더니 개미굴 입구에다 홱 하고 끼얹었다. 봄바람이 불었다. 달큼한 꽃바람에 취하기라도 했는지 다들 입을 댓 발 빼 물고는 애꿎은 심통을 부렸다. 날벼락을 맞은 개미 한 마리가 주먹을 쥐고는 사내놈을 향해 뭐라 뭐라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봄이었지만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은 겨울의 끝에 매달려 있었다.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올려 덮은 사내놈은 반쯤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고는 계집애를 떠올렸다. 새벽이었지만 아직 방은 어두웠다. 계집애는 산골에 어울리지 않게 뽀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봉긋이 솟은 가슴은 금방이라도 꽃망울을 터트릴 것 같은 꽃봉오리를 닮아 있었다. 뽀얀 얼굴에는 밤하늘의 별이 내려앉아 반짝였고, 복사꽃 발그레한 꽃잎 두 장이 곱게 피었다. 말을 할 때마다 꽃잎이 달싹였다. 오늘처럼 따따부따 요란을 떨지 않을 때는 향긋한 꽃내음이 나풀거렸다.
"계집애 성깔머리가 사나워서 어따가 써먹을까 걱정이네"
마음에도 없는 말을 주워 담다가 사내놈은 저도 모르게 발그레 얼굴을 붉혔다. 자꾸만 계집애의 얼굴이 아른거려서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았지만 아른아른 눈앞에 아른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심장이 뛰었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봄이 마자 오지도 않았는데 어둠에 잠긴 방이 더웠다.
좌판에 늘어놓은 댕기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잇꽃물을 들인 댕기는 붉었다. 말간 햇살이 내려앉은 탓이었을까 햇살에 비춘 손바닥처럼 맑은 핏빛이 고왔다. 손에 들린 댕기가 바람에 팔랑거렸다.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지만 선뜻 값을 묻지 않았다. 손에서 내려놓지도 못하고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했다. 한 발 뒤에 서있던 사내 녀석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계집애는 잡았던 손 밀어내듯 미적미적 댕기에서 손을 뗐다. 그제의 일이었다. 닷새마다 선다고 해서 오일장이었지만 빈한한 산촌의 장마당은 파리만 날리기 일쑤여서 듬성듬성 이가 빠지듯 열렸다. 엊그제 장이 섰으니 못해도 다음 장마당이 열리려면 못해도 여드레는 지나야 만 했다. 다시 손을 꼽아봐도 어쩔 수가 없었다. 어둠에 기댄 사내놈의 눈에 계집애가 아른거렸고 빨간 댕기가 팔랑댔다. 그래? 다음 장날엔 꼭 계집애의 손에 댕기를 쥐어줘야지! 벌써부터 시간이 느려터지 기만했다. 계집애의 까만 머리에 불게 핀 꽃송이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새벽 댓바람에 마시는 김칫국이 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