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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

by 이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디 하나씩을 밀어 올린 대나무의 줄기 끝에는 고운 꽃송이 하나 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바람에 서걱대는 댓잎의 무성함보다는 누가 보아도 곱고 예쁜 꽃송이 하나 매달린다면 시끄럽지도 않고, 부는 바람에 온몸을 휘청이는 일 없을 테니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물론 억지라는 것도 안다. 댓잎이 없다면 거추장스러운 풍파야 면하겠지만 삐죽 몸뚱이만 큰 피터팬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은 자명하다.

네버랜드의 피터팬이야 꿈과 상상을 오가며 아이의 모습으로 행복하겠지만, 현실에 발을 딛고 사는 것들이야 상상의 경계를 허물지 못하면, 자라다만 미숙아처럼 우스꽝스러운 내가 남을 뿐이다. 서걱서걱 시끄럽고 폭풍우에 스스로를 부러뜨릴 위태로움 마저

부르겠지만, 댓잎은 성장과 성숙을 견인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雨後竹筍, 비 그친 대숲에 죽순이 돋고 햇살이 반짝이면 하늘을 향한 달음박질이 시작된다. 한갓지고 여유로운 시간은 없다. 줌의 햇살이 생과 사를 가르는 칼날로 번뜩이는데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유유자적 세월을 논할까. 공책 몇 권을 부상으로 수여하는 국민학교의 가을운동회가 아니다. 목숨을 걸고 뛰어야만 하는 사생결단의 뜀박질이다. 그래서 대나무는 하루에 1미터를 자라기도 한다. 자리를 잠시 비우고 밥이라도 먹고 왔을 때 몰라 볼 정도의 성장을 보인다. 말 그대로 우후죽순이다.

속이 비었음에도 속 빈 강정이라 놀림받지도 않는다. 풀이면서 어엿한 나무라는 이름을 갖기도 했다. 빠른 성장을 위해 속을 포기했다. 일단 비워두고 높이 하늘까지 자라자 결심한 녀석들은 강정 같이 뻥튀기를 했지만 대신 마디라는 단단함을 선택해 자랐다. 비었으되 채워진 단단함은 순전히 마디에서 비롯된다. 쪼개지고 부러질지언정 휘지도 않는다. 대나무라는 이름은 길을 가다 거저 주운 게 아니다.

나무에 새겨지는 나이테 같은 하루고 대나무의 마디와도 같은 날이다. 목표를 정하고 곁눈질 없이 뛰겠다 마음을 다잡은 것에 매듭 하나를 묶었다. 혼자만의 놀이 같은 것이기도 해서 중언부언 의미를 둔다는 것도 민망한 일이겠으나, 어차피 산다는 게 그런 거라서 얼굴에 철판 하나쯤은 패션이다 우기게도 된다.

글 하나 쓰고 게시하는 데에 번호를 매기고 부제를 달았다. '短想_ 001'로 시작된 글이 100이라는 숫자를 꼬리로 달았다. 애초에 001이라는 숫자를 부여한 것은 적어도 100이라는 세 자리 숫자를 향한 다짐이었다. 이전에도 다른 이름으로 꼬리표를 단 글들이 있었다. 삶의 부침에 따라 마음도 흔들리고 생각도 멈추는 일은 수시로 있게 마련이라서 가다 쉬다를 반복하는 걸음이었고, 그럴 때마다 마음에 마디 하나씩 새기는 심정으로 숫자를 붙였다. 오늘, 그 마디 하나를 매듭짓는다.

아침부터 북 치고, 장구 치고, 나발을 불어 흥을 돋우고 마음도 다지게 된다. 홀로 꿋꿋하게 견뎌야 하는 세월이 많을 터라서 그렇고, 좌절하여 낙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다. 그늘 드리워 지나는 객을 품어줄 그릇이 못되니 나무의 나이테나 대나무의 마디까지야 바랄까. 꽃송이 하나 곱게 핀 들꽃의 잎줄기 곱게 엮어 풀매듭이나 하나 지었으면 좋겠다. 원님도 없는 빈 행차에 나발을 불어 호들갑을 떠는 이유다. 굳이 욕심을 부리자면 마디의 끝에는 노란 꽃송이 하나 매달려 곱게 피었으면 좋겠다. 향기 짙지 않아도 좋고, 수수한 들꽃이라도 좋다. 다만, 그랬으면 좋겠다.

아, 게다가 오늘은 공교롭게도 귀 빠진 날이기도 하다. 허위허위 살아온 삶에 나이테 하나 더 그려 넣었다. 이래저래 매듭짓기 좋은 날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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