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열기에 모든 것이 시들했다. 넓은 잎을 자랑하던 호박은 물에 빤 이불처럼 널브러져 꼼짝도 않는다. 간혹 불어 가는 바람에도 묵묵부답이다. 죽어 늘어진 사지육신은 쌀가마보다도 무겁다더니 널브러진 호박잎이 그 짝이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면 모두가 그렇게 반쯤 빠진 혼을 붙들고 안간힘을 썼다.
후둑후둑 빗방울이 허공을 가르면 어두웠던 하늘이 동이 트듯 희뿌옇게 밝았다. 소나기다. 어린 계집애와 까까머리 사내놈은 옥수수단을 세워놓은 움에서 긋는 빗줄기를 피했다. 보라색 칡꽃 움켜쥔 손에 보랏빛 물이 들었다. 몰랐으리라. 두고두고 세대를 이어 입방에 오를 연애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잠망스러운 윤초시의 딸이 살았더라면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았을까. 몰려가는 소낙비에 결말을 지워냈다. 어쩐지 새드앤딩은 좀 그렇다. 아들 딸 두엇씩 낳고 잘 살았다 치자. 그게 좋다.
연못 바닥에 뿌리내린 연잎도 폭염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호박잎 널브러지듯 하지는 않았지만 생기를 잃기는 연잎도 다르지 않았다. 정오를 갓 비껴간 수면에 그림자만 짙었다. 가끔 풍덩 소리를 앞세워 뛰어드는 개구리가 아니었다면 연못은 한밤의 고요와 다르지 않았다. 무성한 갈댓잎을 엮어 둥지를 튼 개개비란 놈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애벌레를 잔뜩 물고 와 새끼들의 노란 부리를 채우고 있었겠지만 이글거리는 태양은 날것들의 날갯죽지마저 접게 만들었다. 수다스러운 새였다. 몇 마리의 애벌레를 꼬치에 꿰듯 물고 폴폴 나는 모습은 수다스러운 동네 아낙과 다르지 않았다. 이웃집 박 씨네 밥상이 내동댕이쳐진 이야기며 연못 건너 사는 은주라는 처자의 바람난 뒷얘기까지 물어 나르고 있었다. 동네방네 발품을 팔았다. 연못가 갈대숲은 그래서 늘 시끄러웠고 쿵더쿵 종일 방아를 찧어댔다.
폭풍전야의 고요를 소낙비가 밀어냈다. 후둑후둑 쏴아 바람이 불었고 빗방울이 떨어졌다. 인정도 없고 사정을 살필 겨를도 없이 비가 내리면 거꾸로 펼쳐든 우산처럼 커다란 연잎에 빗방울이 고였다. 순간이었다. 바람에 휘청이고 빗물에 허리를 숙였다.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선술집을 빠져나온 한 무리의 취객들이 휘적휘적 좁은 골목을 점령하듯 했다. 쏟아내고, 받고, 바람에 휘청댔다. 댕가당댕가당 요란을 떨고 소낙비가 물러가면 연잎들은 달걀만 한 구슬 하나씩 가슴에 품고 햇살을 받았다. 영롱하게 빛났다. 빗방울 하나 연잎에 떨어지면 무게를 이기지 못한 연잎 마침내 또르르 빗방울을 쏟아냈다.
방금까지 햇살에 반짝이던 빗물은 더는 없다. 또르르 갸우뚱 기운 연잎을 구르는 순간 연못의 흙탕물이 되었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아흔아홉 모였던 빗방울에 하나를 더하는 순간이면 연잎은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그게 전부였다. 마지막 한 방울의 무게가 문제였다 타박하지 마라. 뜻하고 내리는 빗방울은 없다. 그저 소낙비가 내렸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