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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봄


"얼마만큼 남았나요?"

"응? 이제 거의 다 왔어!"

머릿속에 쉽게 떠올리고 쉽게 그릴 수 있는 풍경이다. 산을 오른다거나 아이의 손을 잡고 제법 먼 길을 걷는다면, 누군가는 얼마나 남았냐 물을 테고 누구는 다 왔다며 달랠 터였다. 요 언덕만 넘으면 돼. 부드러운 말은 미풍으로 불어 귀를 간질이고 빤히 얼굴을 쳐다보던 아이는 금세 환하게 웃음을 짓겠지. 절집 처마에 햇살 같은 바람이 매달려 싱긋 웃었다.

빤히 바라보이는 산마루도 길을 걷다 보면 생각만큼 가깝지 않음을 알게 된다. 산허리를 돌아야만 하고 애써 올랐던 길을 뚝 잘라 계곡으로 내려서야만 한다. 돌부리에 지친 걸음은 점점 무거워져 속도를 낼 수도 없다. 그럴 때는 그저 철퍼덕 주저앉아 땀을 훔치는 게 상책이다. 억지를 부린다고 될 일이 아니다. 가쁜 숨 몰아쉰다고 있던 길이 반으로 접히지도 않는다. 숨을 고르고 신발끈도 다시 한번 매야만 한다. 단박에 닿는 길은 없다. 쉬는 동안에 걸어온 길도 돌아보며 길가에 핀 들꽃에도 입맞춤을 하는 호사도 누리면서 걷는 게 길이다.

길은 늘 휘고 굽었다. 물길이 그랬고, 바람이 불어 가는 바람길도 그랬다. 솔가지 늘어선 길에선 뾰족뾰족 솔잎을 어루만지며 돌아 불었다. 그래서 바람의 냄새를 맡으면 바람이 불어온 길을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배꽃이 흐드러진 과수원을 지나고 이웃집 밥 짓는 굴뚝 곁을 어루만지며 불었다. 이웃집 아궁이에선 버드나무가 타고 있을 게 분명했다. 바람에선 버드나무 푸릇한 냄새가 났다.

휴~~ 하고 숨 고르기 한 번이 필요했다. 갈라진 붓끝에서 만들어진 길은 거칠었고 투박했다.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길은 애초에 기대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붓을 든 손이 부드럽지 못했고, 허위허위 걸어온 발걸음이 그렇게 고르지도 못했다. 주인을 닮은 글자가 갈라져 거칠게 버티고 섰다. 몰아쉬는 숨처럼 획은 가쁘고 사나웠다. 그렇다고 종이를 구겨 없애고 싶지도 않았다. 애써 덧칠해 꾸미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나를 닮았을 뿐이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서로 겸연쩍었을 뿐이다.

한 굽이 돌아들며 요 모퉁이만 지나면 잘 닦여진 길이 분명 나올 거야!' 하는 기대를 버릴 수는 없듯, 가쁜 숨 고르며 모퉁이 너머 끝에서 너 기다렸으면 하고 바랐다. 몇 굽이의 길을 더 가야만 하는지도 모르지만 쉬엄쉬엄 들꽃에 입 맞추며 가는 길을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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