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 자맹(David Jamin)은 프랑스작가다. 그는 꽤나 잘 나가는 작가이고 주목받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초상을 처음 보았을 때 먼저 드는 생각은 무척이나 화려하다는 거다. 어떤 특정한 색으로 화면을 이끌지 않았다. 다양하고 화려한 색들의 조합으로 커다란 화면을 완성한다. 어느 한 구석에 잔뜩 주눅 든 얼굴로 찌푸리고 있는 것들은 애초에 없다. 유쾌함이다.
그의 작품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도 거기에 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도 우울하거나 무겁지 않은 이유다. 온갖 대비되는 색들이 한 데 어우러져 이야기를 한다. 대화가 아니라 수다에 가깝다. 까르르 숨 넘어가는 웃음은 빼놓을 수 없는 화두이기도 하다. 밝고 화려한 색감의 유희다. 손바닥에 잔뜩 물감을 묻힌 아이들이 백지에 손도장을 찍는 놀이다. 빨갛고 노란 원색이 거침없이 붓끝에서 그어졌고, 때로는 툭툭 흩뿌려졌다. 그러면서도 유화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스며듬이 언뜻언뜻 보이는 것만 같아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경계의 모호성, 그의 초상은 중성적 느낌이 강하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자아의 충돌이 내면에 있다. 끝없는 내면의 충돌을 담으려는 작가의 고뇌는 끊어지고 이어지는 사물의 윤곽선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미완의 퍼포먼스다. 정체성의 모호함을 통해 내면의 고뇌를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도 작가만의 위트와 유쾌함은 빠지지 않는다.
그의 초상은 켜켜이 이야기가 쌓여 완성된다. 한 번의 지나침으로 채색이 완성되지 않는다. 수없이 덧칠하는 과정에서 이야기 하나씩을 풀어놓는 방식이다. 박수근의 빨래하는 풍경처럼 쌓여 드러나는 안료의 재미를 놓치지 않았지만 박수근의 그것처럼 무겁지도 않다. 그것은 아마도 작가의 사회적 성장 배경이 만드는 내면적 고뇌가 다르기 때문일 거다.
그는 유쾌하다. 그래서 벽에 걸어두고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웃음 지을 게 분명하다. 그런 매력에 한 번 더 눈길을 줬는지도 모른다. 내게 없는 거라서 더 그렇다. 내게 없는 것을 가진 사람에게 더 매력을 느끼는 게 심리일 터다. 보완의 의미가 내재된 무의식의 끌림이기도 하고, 의도된 접근일 수도 있겠다.
애써 우울을 찾을 이유는 없다. 곁에 가까이 두고 고운 임 바라보듯 바라볼 일도 없다. 이왕이면 밝고 화사한 것이 좋다.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듯 유쾌한 감염이라면 천 번이라도 감염되어도 좋다. 다비드 자맹은 그런 작가다. 미술에 문외한이라 할지라도 그의 작품 앞에 서면 미소 짓게 된다. 감염이다. 설령 초상의 주인공이 유쾌하고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자맹의 눈을 통해 재편집된 그는 유쾌하다. 그를 통해 우리도 유쾌한 그의 가치관을 공유한다. 해석은 그의 몫이고 받아들여 공유할지의 문제는 나의 몫이기도 하다. 낡은 피아노를 모티브로 붓을 들었을 때 아이들이 통통 건반 위에서 뛰고 놀았다. 까르르 자지러지게 웃는 아이는 영락없는 천둥벌거숭이다. 가릴 것도 없다. 풀밭을 뒹구는 강아지처럼 봄볕에 겅중거렸다. 아이의 천성이 거기에 닿아 있었다.
가끔은 핸드폰에 저장된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반 음쯤 높은 목소리를 듣는다. 무거워 가라앉지 않는 목소리다. 호호호 웃는 웃음도 그렇다. 가볍고 유쾌하다. 너와 수다를 떨다 보면 나도 모르게 힘이 충전되는 느낌이야 말을 하면 그가 그런다.
"어쩐지 요즘 누가 빨대를 꽂고 에너지를 쪽쪽 빨아내는 느낌이 든다 했더니만 범인이 너였구나! 호호호"
유쾌한 받아침이다.
떠올려 생각나는 말이 있다면, 그런 느낌이 있다면 그건 그가 만든 초상이 있어서다. 그가 책임진 그의 몫이 그렇게 보이는 거다. 거울 앞에 서서 들여다보았다. 初老의 어중된 얼굴이 나를 본다. 때때로 고뇌하는 내가 존재하고, 우울함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녀처럼 가벼운 목소리로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자맹의 초상처럼 치열한 유쾌함이면 더할 나위 없겠다. 내 몫의 내가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