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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봄 Jun 01. 2023

지단 곱게 부치고

비 온 뒤에 땅이 굳듯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사연 몇 개쯤은 양념으로 섞여야 맛을 더하고, 고명도 하나쯤 그럴싸하게 올려줘야 때깔도 살아나고 입맛도 돋우게 된다. 고추장에다 참기름 몇 방울 떨어뜨려 쓱쓱 비벼내는 비빔밥도 상차림의 단계에선 온갖 정성을 쏟아 모양을 낸다. 눈으로 먼저 먹어야 하는 까닭이다. 어차피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다느니 하는 것처럼 뭘 모르고 떠드는 말도 없다. 시각적 자극을 통해 미각이 한층 더 극대화된다는 걸 애써 무시하는 처사다.

긴 겨울이 지나고 야트막한 동산에 연분홍 고운 자태 뽐내며 진달래가 피면,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화전놀이를 즐겼다. 봄을 즐기고 흥을 더하는 데에는 신분의 높고 낮음도 없었다. 진달래는 먹을 수 있는 꽃이라 하여 참꽃이라 했다. 화전으로도 먹고 술을 빚어 마시기도 했다. 발그레 꽃물이 드는 술은 두견주다. 두견주 붉은 술에는 꽃향기 배었을까? 이름 석 자 겨우 들어 주절거리는 탓에 그 맛은 모른다. 그러니 향도 당연히 모른다.

술을 빚는 진달래는 그렇다 치자. 다만, 화전에 얇게 펴 지져내는 진달래 꽃잎이 무슨 맛이 있다 할까? 먹을 수 있다는 것과 맛있다는 말과는 별개의 문제다. 제일 먼저 봄의 기운으로 산천을 물들이는 전령사로써의 진달래가 반가울 터였다. 얇게 편 반죽에 곱게 올라앉은 모습이 흡사 아리따운 처자처럼 고울 터라서 더욱 반겼겠거니 하게도 된다. 혀의 맛이 아니라 눈의 맛이다. 겨울을 이겨낸 봄의 맛이다.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듯 맛도 다르지 않다. 생각이 만든 관념의 맛도 있게 마련이다.

우여곡절 사연들이 쌓여 관계의 친밀도를 높인다.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는 마음의 거리는 그래서 중요하다. 두 팔 벌려 뻗은 만큼의 거리가 사람과의 적당한 거리라고 한디. 그 거리를 넘어 가까이 다가서면 불편을 느낀다. 초면이라면 더욱 그렇다. 거기다 우락부락 험상궂은 얼굴이라면 불편을 넘어 위협을 느껴 뒤로 물러서고야 만다. 굳이 따지고 들자면 다가선 사람의 잘못도 아니다. 조심성 부족했고, 매너가 없다 핀잔을 들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위협을 가한 것도 아니므로 잘잘못을 따지기에도 애매하다. 그렇다고 해서 물러난 사람이 특별히 까칠한 사람도 아니다. 사교성이 떨어진다 치부할 수도 없다. 그저 마음속에 내재된 방어기제가 작동했을 뿐이다.

낯을 익히고 충분히 상대를 알아갈수록 마음의 거리는 좁아지게 된다. 한 걸음 더 다가선다고 해도 위협감을 느끼지 않는다. 상대가 더 이상 내게 위협의 존재가 아니라고 판단됐을 때 뻗은 팔보다 가까운 거리를 허락하게 되는 것, 심리적 거리다. 마음의 빗장을 풀고 비로소 내 안에 받아들인다는 건 그래서 어렵고 까탈스러운 일이다.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다. 어느 날 불쑥 나타나 손을 내밀며 '나는 네게 위협을 가할 생각이 없다'라고 천 번을 떠들어도 소용이 없다. 이성적 판단으로야 백 번을 수긍한다 하더라도 감성적 빗장은 요지부동 꿈쩍도 않는다.

비에 젖었던 땅이 단단하게 굳을 시간이 필요하고, 맛을 더해주는 양념 두어 숟가락이 필요한 거다. 긴 겨울의 끝에 맛보는 참꽃의 여유가 거리를 가깝게 한다. 노랗고 하얀 계란 지단이 냉면을 한층 더 맛깔나게 하듯, 마음 한 자락 지단을 부치듯 치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나저나 알록달록 고명이 곱다. 그러니 너는 더 가까이 왔으면 좋겠다. 편히 널 안을 수 있는 거기쯤에 있어다오. 이마를 맞대고 속삭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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