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봄 Jun 12. 2023

소풍


모처럼 켜놓은 텔레비전은 저 혼자 신나서 떠들고 있었다. 커피잔을 든 사람들은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다가 언성을 높여 성토하기도 하고, 막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꼬맹이의 긴 통화를 엿들으며 웃기도 했다. 저녁 밥상을 물리고 난 뒤의 흔한 풍경이다. 남자는 그 흔한 저녁 풍경에 깍두기로 낀 지 꽤나 되었다. 동생네 곁으로 봄이 막 시작될 무렵 이사를 하고는 줄곧 밥상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혼자 사는 남자를 생각한 동생의 배려였다. 점심과 저녁 하루 두 끼를 오가며 먹었다.

"내일 점심에는 밥 먹으러 못 와"

"오빠 어디 가려고?"

남자가 말했고 여동생이 말을 받았다.

"응, 어디 좀 가려고...."

"김포 가는구나. 언니 만나러... 호호호"

남자의 동생은 재밌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잘 다녀와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남자의 하루를 꿰뚫고 있었기에, 남자의 한마디에 이미 손금 들여다보듯 그의 내일은 훤히 보였다. 남자의 하루는 그만큼 단순하기도 했고, 애써 감출 일도 없었다. 가끔은 다 늙어서 동생에게 하루 일과를 보고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남자는 그의 여동생이 말하던 김포 언니를 만나기로 했다. 한 달에 서너 번 있는 외출의 대부분은 그녀를 만나기 위한 외출이었다. 열에 아홉은 그랬다. 가끔 얼굴을 보고 밥을 먹는 말하자면 남자의 데이트였다. 남자는 들어내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심 마음 설레며 내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는 어찌나 시간이 가지를 않는지 손가락을 접어가며 기다렸다. 늘 그랬다. 약속을 잡고 돌아서는 순간부터 늘 며칠 밤만 자면 된다는 식으로 날짜를 헤아렸다. 소풍날이었고 소풍을 기다리는 꼬맹이였다.

날이 밝았다. 창문을 열고 창문 밖으로 몸을 반쯤 삐죽 내밀었다. 날씨가 궁금해서 방금 전 일기예보를 확인한 그였지만 정말 그런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방금 전에 확인한 일기예보는 이랬다. 구름 조금, 흐림.... 나쁘지 않았다. 소풍을 망칠 날씨는 아니었다. 몸을 내밀고 올려다본 하늘도 일기예보처럼 옅은 구름이 조금 끼어있었고 파란 하늘이 반쯤 보였다. 오늘은 기상청이 밥값을 제대로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달그락달그락 냄비에서 계란이 삶아지고 있었고, 구멍가게에서 사 온 나무도시락은 허연 배를 들어내놓고서 밥상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손질이 끝난 당근이며 시금치는 얌전하게 자리를 지키며 순서를 기다렸다. 밥이 까만 김에 곱게 누우면 햄이 그 위에 제일 먼저 자리를 잡고 누웠다. 엄마의 등에 기대 김밥이 말리는 걸 꼬맹이는 지켜보며 웃었다. 고소한 아침이었다. 한없이 화창하고 유쾌한 아침이라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도 없었다. 그런 꼬맹이를 보며 그의 엄마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김밥이 그렇게 맛있어 보이니?"

꼬맹이는 말 대신 머리가 떨어져라 고개를 끄덕였다.

"잘 잤니? 아직은 일어날 시간이 아니네. 난 진작에 일어나 하늘도 확인하고, 커피도 한 잔 마셨어...ㅎㅎ"

자는 사람을 깨울까 싶어서 조심스러웠지만 조금 길다 싶은 문자를 보냈다. 설레는 아침에 들뜬 마음을 얘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벌써부터 일어나 너를 생각하고 있다고 생색을 내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고.... 거기다가 하도 들어서 귀에 딱지 앉겠다던 말도 빼먹지 않은 남자였다.

"사랑해 은경아! ♡"

문자를 보낸 남자는 싱글벙글 입이 귀에 걸렸다. 날씨도 좋고 그보다 몇 곱절은 더 좋은 마음이었다. 흥얼흥얼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주방에선 달그락달그락 계란이 삶아지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신기하기도 하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