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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봄 Jun 25. 2023

金石盟約


허허, 고놈들 참.... 언놈이었을까? 철수였을까? 아니면 기생오라비 같은 기영이였을까? 가뜩이나 몽글몽글 가슴에 봄바람이 부는데, 그것도 귓가에 꽃을 꽂아주며 사랑한다 속삭이는데, 어느 누가 허투루 들을까. 귓전을 파고드는 말 한마디는 천둥처럼 울었을 터였다. 세상 그보다 달콤한 말도 없을 터였고, 그보다 말랑한 말도 없을 거였다. 몇 날 며칠을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발그레 얼굴을 붉혔을 순이였다. 날마다 한 자씩 바위를 정으로 쪼아 새기고, 쇠를 긁어 천 년을 한결같을 거라 철석같이 믿고 말고. 그런 순이의 순정을 헌 짚신짝처럼 팽개친 놈의 낯짝이 궁금했다.

"순이는 어느 봄날, 꽃을 꺾어 머리에 꽂아 주면서 어설프게 한 사랑의 약속을 금석맹약처럼 생각하여 평생 가슴앓이를 했다"

봄바람은 늘 사고뭉치로 불었다. 산천이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여기저기 새순이 돋아 꿈틀거렸지만 봄날의 들녘은 바짝 마른 장작더미와 다르지 않았다. 검불에 그은 성냥불은 산불로 번지기 일쑤였고, 하늘을 가득 채우는 것은 흰 구름이 아니라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일 때가 많았다. 들불이 타고 산불이 산등성이를 타고 달음박질쳤다. 그래서 그랬을 터였다. 동네 반듯한 바람벽에는 울긋불긋 포스터가 자주 내걸렸다.

"자나 깨나 불조심!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자극적인 문구가 난무했고 원색의 물감이 시선을 붙들었다.

연분홍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면 순이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목구멍에 돌덩이 하나 끼인 것처럼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넘길 수가 없었다. 꺼억꺼억 트림이 넘어오고 물에 말아 겨우 넘긴 식은 밥은 소화도 되지 않았다. 울 뒤에 진달래가 봉긋하게 꽃봉오리를 키우면 영락없이 채기가 돌았다.

언제였을까. 그때도 봄바람이 불었고 진달래가 툭툭 꽃봉오리를 터뜨리고 있었다. 싱숭생숭 잠도 오지 않았다. 이유도 없이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고 얼굴은 수시로 붉어졌다. 뒤란으로 이어진 산비탈에서 진달래 꽃가지를 꺾고 있을 때, 그 녀석이 와락 순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둘은 진달래 꽃무더기에 몸을 숨긴 채 연분홍 봄바람을 들이쉬었다. 어지러웠다. 향긋했지만 향긋한 만큼 숨을 쉬기에 힘이 들었다. 평소 말수가 없던 그가 그처럼 많은 말을 쏟아낼 줄은 미처 몰랐다. 봄날이었다.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에야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꺾어놓았던 꽃가지에 핀 꽃들은 이미 다 시들어있었다.

머리가 조금 더 굵어지고서야 지켜질 약속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때만 되면 가슴이 먹먹해서 밥술을 뜰 수가 없었다. 긴 겨울이 지나고 아지랑이가 필 때면 거르지도 않고 순이는 열병을 앓았다. 그렇다고 그 녀석을 원망하는 것도 아니었다. 때 되면 붉은 노을이 지는 것과 다르지도 않았다. 봄이면 꽃이 피었고 눈앞에 아른거리는 얼굴 하나가 있었을 뿐이다. 아궁이에서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는 버들개지처럼 피식 웃었다. 보글보글 수액이 끓고 부지깽이를 든 순이의 가슴엔 몽글몽글 추억이 맺혔다. 그날처럼 진달래 피는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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