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섭게 내리던 장맛비가 자취를 감추고 언뜻언뜻 파란 하늘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공원의 크고 작은 나무들이 그만큼의 그림자를 만들고, 사람들은 또 적당한 그늘을 찾아 삼삼오오 무리를 지었습니다. 멀리 떨어진 그들이 때로는 웃었고 누구는 강아지를 데리고 망중한을 즐기고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를 기웃거리다 불어온 바람은 하하 호호 웃음 한 보따리를 매달고 왔지요. 도시의 소음에 묻힌 그들의 대화는 엿들을 수 없었지만 웃음소리만큼은 그래서 또렷하게 들리는구나 하게 됩니다. 말갛게 갠 바람입니다. 끈적끈적 들러붙는 바람이 아니라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늘 같아 보이지만 결코 같지 않은 하늘이 반갑습니다. 보이지도 않는 바람이지만 살갗을 스치는 느낌은 매일매일이 새로워서 또 반갑다 하게 됩니다. 비구름 몰려간 하늘이 바다처럼 철썩였습니다. 파도로 부서지는 포말이 삐죽 솟은 빌딩을 기어오르고, 갈매기를 대신해 비둘기가 군무를 펼쳤습니다. 멍하니 바라보는 마음에도 파도 한 줄기 몰려들었습니다. 몰려왔다 몰려가는 세월을 빼닮은 파도입니다. 덧없이 부서지는 파도는 그리움이기도 합니다. 그립다는 건 가끔씩 문득문득 가슴을 헤집고 달아납니다. 밑도 끝도 없는 느닷없는 출현에 깜짝 놀라게도 되지요. 예고도 없는 방문입니다. 그래서 더욱 아련한 마음이 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바탕 소낙비가 쏟아지고 나면 영락없이 산허리를 붙들고 기어오르는 산안개와 닮았습니다. 밥 짓는 연기처럼 구수한 냄새도 풍기는 것만 같아 킁킁 냄새를 맡게도 됩니다. 파도가 하얗게 몰려들고, 산안개 뭉개 뭉개 피어오르면 나도 모르게 신발끈을 고쳐 묶고서 먼 길 위를 서성입니다. 갈 곳도 없는 걸음인데 바쁜 이유는 뭘까요. 모르겠습니다. 바람도, 햇살도, 부서지는 파도까지도 장난꾸러기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잠자리가 떼 지어 날았습니다. 온통 몸뚱이가 황톳빛이 나는 놈들입니다. 예전 시골에서는 메밀잠자리라고 부르던 잠자리입니다. 녀석들은 오늘처럼 여름비가 크게 내리고 난 뒤에 느닷없이 하늘을 점령하고는 했는데, 어디에 몸을 숨겼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떼 지어 나타나는지는 모릅니다. 여름이 기승을 부리는 날, 오늘처럼 나타나 메밀씨를 뿌리라 재촉했지요. 놈들이 나타날 무렵이 메밀을 파종할 때입니다. 느지막이 툭툭 뿌려놓으면 저 알아서 꽃을 피우고 씨를 맺는 게 메밀이기도 하지요. 게으른 농부에겐 더없이 좋은 작물입니다. 농부의 발걸음도 필요 없다 귀를 닫아버리는 기특한 작물이지요. 게으른 농부의 눈에도 떼 지어 하늘을 나는 잠자리는 보였을 테지요. 허리가 부러져라 방바닥을 뒹굴다가도 메밀잠자리 떼로 날면 키 큰 풀들 대충대충 허리를 부러뜨리고 휘휘 씨앗을 뿌리면 그만입니다.
농사일도 없는데 잠자리만 보면 종댕이 가득 메밀씨를 담고서 묵밭에 서고야 맙니다. 몸에 밴 그리움입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훈장쯤 되려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반가울 수밖에요. 소금쟁이처럼 파란 하늘가를 뛰노는 녀석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오이 서넛에다 참외 몇 개 개울물에 띄워놓고서 첨벙거리던 꼬맹이들이 눈에 아른거렸습니다. 창피한 것도 없이 발가벗고 첨벙 대던 여름입니다. 그때도 잠자리가 하늘을 첨벙첨벙 뛰어다녔습니다. 파도처럼 밀려왔다 어느새 몰려가버린 세월이 말갛게 부서집니다. 공원의 모퉁이에 앉아 몽글몽글 그리움에 젖었습니다. 새벽까지 몰아치던 빗줄기보다도 더 흠뻑 젖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