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 정도 된 안경의 렌즈가 더는 내 눈을 밝혀줄 수 없는지 눈이 침침하다. 정기적으로 시력검사를 하고 그에 맞는 렌즈로 교체해야겠으나 그 정기적인 검사가 언제인지 알 수도 없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새로 생긴 노트북의 글자를 키웠다. 기존에 맞춰진 글자들은 꼬물꼬물 개미처럼 기어 다녔다. 줄지어 걸어가는 개미들로는 무엇 하나 제대로 볼 수가 없다. 키우고, 늘리고, 부풀려야만 그나마 늙은 내 눈을 밝힌다. 어둑어둑 가물가물한 시간이다.
오라는 곳도 가야만 하는 곳도 딱히 없는데 마음은 늘 종종걸음으로 목적도 없이 바쁘다.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르는 뭔가에 마음을 빼앗긴다. 스쳐가는 바람 한 줄기를 종일 좇다가 낯선 어떤 곳에서 정신이 들는지도 모른다. 침침한 눈처럼 생각의 끝도 두리뭉실 좋고 나쁨이 한 데 섞여 어지럽다. 장마철 하늘이다. 쏴아 비가 몰려가고 이내 반짝 햇살이 쏟아진다. 큰 비를 앞둔 개미떼처럼 한 무리의 사람들이 줄지어 몰려간다. 다들 어디로 가는 걸까?
이렇듯 많은 사람들은 제 갈 길이 있어 걸음을 서두르고, 연신 굉음을 내며 전철은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플랫폼 가득 늘어섰던 사람들은 진공청소기에 빨려들 듯 객차에 몸을 숨겼다. 바쁘고 한가롭다.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세상은 더없이 한가롭다. 한 걸음의 물러섬이 주는 풍경이다. 기차의 시간표를 확인하며 헐레벌떡 계단을 오르는 사람이야 진땀을 빼야만 하겠지만 내게 보이는 풍경은 한가로움을 넘어 흐느적 느려터졌다.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데 분수의 물줄기는 저 홀로 허공을 가르다 이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목마른 비둘기 한 마리쯤 기웃거려도 좋을 텐데 비둘기 한 마리 얼씬대지 않는다. 빈 분수다. 사람이 없으니 한가롭다. 그나마 바람이 불 때마다 솟구치던 물줄기가 방울방울 쪼개져 흩어졌다. 아이들이 첨벙첨벙 물장구를 쳤다. 부는 바람이 없는 아이들을 대신하고 있었다. 물보라가 하얗게 이는 정오다.
말 많은 남자는 날마다 수다스럽고, 귀 따가운 여자는 날마다 말문을 막는다. 이해 못 할 것 없겠으나 서운한 마음에 말문을 닫는다. 여자는 좋겠다. 남자가 입을 닫았으니....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투덜투덜 마음에도 없는 말 몇 마디를 입에 올렸다가 그만두었다. 꼭 끊지 못하는 담배 같다. 그렇게 잔소리를 듣고 욕을 먹으면서도 고놈의 담배를 사고야 만다. 몸에 가장 해롭다는 말은 딱지가 앉고 옹이로 굳었다. 그래도 끝내 담배를 피워 문다.말도 그렇다. 그만둬야지 하다가 입이 근질거려 먼저 또 입술을 뗄 거였다.
돌아오는 말이 그다지 맘에 들지 않는다.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색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어차피 오래전부터 기울어진 시소였다. 모르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고슴도치 가시 세우듯 톡톡 쏘아붙이는 건 도대체 곱게 받을 수가 없다. 다짐하듯 말 수를 줄여야지 하다가도 불을 붙여 입에 가져가는 담배와 같다.
쌉싸래한 씀바귀가 꽃을 피웠다. 작고 수수한 꽃이지만 하얀 꽃송이가 시선을 잡아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쪼그려 앉았다. 그 속에 숨은 쓴 맛이야 나는 모른다 딴짓을 했다. 햇살에 하얗게 부서지는 꽃은 쓰고 아린 숨은 아픔 따위는 애초부터 없어 보였다. 짐짓 시치미를 떼고서 하얀 미소로 인사를 했다. 그래, 나도 반갑다 인사를 했다. 지난주에는 없던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