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거운 바람이 불었다

by 이봄

역사와 공원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못해도 셋은 되었다. 가끔 그들을 바라보며 글을 썼다. 역사 바로 밑 일층의 택시승강장에서 하루를 보내는 사내가 있고, 잣나무와 왕버드나무가 커다란 그림자를 내어주는 곳에 둥지를 튼 남자가 있다. 그리고 셋 중 나머지 한 명은 여자다. 얼핏 보아하면 나이는 셋 중 가장 어려 보인다.

그녀는 큰길에 접한 버스승강장과 전철역을 대각선으로 잇는 산책로의 중간에 산다. 벤치 두 개가 어깨를 맞대고 있는데, 그곳이 그녀가 둥지를 틀고 앉아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낮에도 자리를 뜨지 않는다. 그녀가 입은 철 지난 트레이닝복은 짙은 감색이다. 긴팔 소매를 팔꿈치까지 접어 올렸지만 더위를 피할 수는 없었는지 연신 이마를 닦아내고 있었다. 그러다 끝내 더위를 견딜 수 없을 때 곁에 드리워진 느티나무 그늘에 기대서서, 방금 전까지 그가 지키고 있던 벤치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보따리 보따리 짐이 한가득이다. 두 개의 벤치 가득 검은 비닐봉지가 포개져 쌓여있다.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봉투의 주둥이는 하나 같이 꽁꽁 틀어 묶여져 있었다. 소중한 기억을 붙들어 묶었는지도 모른다. 추억이 스며 버릴 수 없는 옷가지며 그런 따위의 것들이 몇 개의 보따리를 채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 망가진 조그만 수레에 보따리 몇 개를 싣고 잠깐 공원을 떠나기도 한다. 먹을 것을 구하러 근처의 시장을 다녀올 때에도 손수레 가득 보따리를 싣고 움직인다. 흡사 피난길에 나선 그 옛날의 아낙네다. 어쩌면 놓지 못하는 과거의 어느 모퉁이를 떠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늘 어딘가를 서성인다.

셋 중 두 사람은 오간데 없이 모습을 감췄다. 주룩주룩 비 내리는 날에는 뚫린 하늘이 축축하게 젖었고, 남자가 기대 잠들던 그늘도 빗줄기에 떠내려가 소용이 없었다. 햇살을 막아줄 수는 있어도 빗줄기를 막아줄 수는 없었다. 남자는 오늘 어느 그늘을 찾아 잠이 들었을까? 늘 그는 누워 잠을 잤다. 움직이는 그림자를 따라 몸뚱이를 굼벵이처럼 꿈틀거려 잠을 잤다. 그렇게 몇 잠을 자고 나면 남자도 번데기가 될 수 있을까?

여자는 그 많던 짐을 하나 남김없이 옮겼다. 머물렀던 자리엔 쓰레기 하나 남기지 않고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뽀얀 벤치만 덩그마니 남겨놓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비를 피해 어디든 갈 곳이 있다는 얘기여서 그렇다. 혹여, 불청객으로 쓴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일단은 비를 피해야만 했으므로 낯 두꺼운 그녀가 돼야만 했다. 엉덩이를 들이밀고 딴청을 피워도 좋다. 오락가락. 내리는 비는 좀처럼 뽀송한 벤치를 내줄 수 없었다. 보따리 보따리 담긴 그녀의 소중한 기억들을 뽀송하게 지켜야만 했다. 더는 그녀에게 남은 것이 없다. 집도 절도 남은 것 없는 그에게 그것들은 그래서 소중하다. 떠도는 마음 한 자락쯤은 포근한 기억에 닿아 젖먹이처럼 쌔근쌔근 잠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키 작은 사내는 뚱뚱한 몸을 끌고 손님을 기다리는 기사들 사이에서 수다를 떨고 있다. 두서없는 말은 오락가락 내리는 비처럼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탓에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허허 그거 참.... 탄식을 하거나 빙긋 웃어넘겼다. 그러다 자판기에서 뽑은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불쑥 내밀었다. 수다를 떨던 남자는 고맙다고 꾸벅 인사를 하고는 내민 커피를 받아 들고 달게 마셨다. 이야기 값이다.

비가 쓸고 간 공원은 정갈하고 조용했다. 시끄럽게 날던 비둘기도 자취를 감췄다. 어느 처마밑이 시끌시끌 어지러운지도 모를 일이다. 비에 흠뻑 젖은 벤치만 한가롭게 앉아 멱을 감는다. 지켜보는 나만 빗속에 앉아 죽은 말 지키듯 앉아 고요하다. 자판기의 뜨거운 커피 한 잔 내미는 이도 없다. 비는 피하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나 있을까. 불어 가는 바람이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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