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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뵙네요?

by 이봄


세상에나! 뭘 보고 다녔나 모르겠다. 수도 없이 그의 앞을 지나쳤음에도 나는 보지 못했다. 그의 얼굴은 한 길 반쯤 커다랗고 원색의 강렬함으로 분칠을 하고 있었다. 원시의 햇살이다. 초록은 더없이 짙고 빨강은 이글이글 뜨거웠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보지 못했다. 눈 뜬 장님이 따로 없다.

하늘 한 번에 물 한 모금 마시는 병아리까지는 아니어도 하늘을 굳이 외면할 일은 없었다. 늘 불러다가 글 속에 지나가는 행인 1로 둔갑을 시키는 별도, 달도 다 하늘에 있는 것을 어쩌자고 보지 못했을까. 고개를 꺾고 머리를 잔뜩 젖혀야만 보이는 그도 아니었다. 잠시 시선만 위로 올려도 보았을 그를 오늘에서야 겨우 대면했다. 허옇게 뜬 그의 눈이 빛났다.

땅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나는 남들이 버리고 외면한 것들만 찾아다녔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내게 주어진 일이 그런 거였으니까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보다도 큰 그 얼굴을 한 달을 꼬박 채우고서 대면한다는 건 좀 웃기는 일이었다. 아, 세상에나! 탄식의 말이 절로 새어 나왔다. 하루 이틀 그의 앞을 오갔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꼬박 한 달이란 시간을 채우는 중이다. 놀랍다. 사람이 본다는 것도 그래서 머릿속에 담아 기억한다는 것도 놀랍다.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머리에 저장되고 지워진다는 게 그저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선택적 기억이랄까. 필요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선별하고 지운다는 게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돌아갈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야에 들어오는 온갖 정보를 다 기억할 수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다만, 그것을 선택하고 버리는 것에 애초의 내 사고가 영향을 줄 터다. 나의 시선은 땅바닥에 고정됐고 생각도 거기에 갇혔는지 모른다. 그러니 크고 작은, 짙고 옅음은 안중에 없었다. 봐야만 하는 것에 지나친 집착이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 듯싶다.

정자에서 바라본 풍경에는 그가 없었다. 화닥닥 쏟아붓고 달아나는 여름 소나기가 있었고, 먹구름 흩어진 자리에 빼꼼히 얼굴 내미는 햇살이 있을 뿐이었다. 우산을 펼쳤다가 주섬주섬 다시 우산을 접어야만 하는 번거로움이 질주하는 경주마처럼 시야를 좁히고 생각을 가뒀다. 닫힌 시야로 바라보는 세상도 그만큼 좁고 옅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탄식의 말을 내뱉게 되는 거였다.

너를 바라봄에도 얼마나 많은 기억의 삭제와 왜곡이 존재할까 문득 궁금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혹여라도 있을 좋지 않은 무엇을 구태여 찾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내가 지나쳐버린 너의 좋은 면을 찾는 게 온당하겠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다음에야 어여쁜 모습을 찾아 헤매는 게 향기로운 일이다. 고운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꽃송이 하나라도 더 필 터여서 그렇다.

'너를 마음에 담는 것'이라고 말을 썼다. 늘 나의 새벽은 이르다. 어둠 가득한 시간에 부지런을 떤다. 새벽잠이 달아났다는 건 늙어간다는 증거다. 하긴, 달아난 새벽잠이 아니더라도 나이를 먹고 있다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방금 떠올렸던 글 한 줄을 돌아서면 까마득히 잊고야 만다. 건망증이 일상이 되면 청춘의 초롱초롱했던 기억들이 얄궂게도 장난을 친다. 놓치고, 잊어버리고, 지워버린 기억의 파편들 속에서 나는 너의 또 다른 매력들을 찾으려 한다. 우당탕퉁탕 번개가 치고 우르릉 쾅 천둥이 울듯 백 년을 버틸 기억들을 만들고 싶다. 마음에 고이 모셔두는 기억이 좋다. 돌무더기 쌓아 올려 소원을 빌고 암벽에 쪼아 새긴 이야기들, 먼 훗날 포르르 까치의 날갯짓에 반갑게 떠오를 터다. 버선발로 맞을 반가움이 여기저기 흩어져 주인을 기다린다.

모르고 지나쳤던 벽화 속 얼굴을 낯설게 바라본 오늘처럼 너의 숨은 매력을 하나씩 찾아내는 것. 한결같음에 새로움을 더하는 게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다. 나는 그렇게 오늘을 기억한다. 은경이 너 있어 하루하루가 새롭다. 새롭다는 건 참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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