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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할머니

by 이봄

오늘도 여전히 갈피도 없이 비가 내리고 공원의 벤치를 떠도는 이들은 햇살처럼 숨바꼭질로 나타났다 숨기를 반복합니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입니다. 눈에 띄는 변화가 반가울 때도 있지만, 그와 반대로 변하지 않은 오늘이라서 더욱 반기는 날도 있지요. 특히나 요즘처럼 물난리로 인명이 상하고 재산을 잃는 때에는 그 마음이 더합니다. 무탈하다는 거, 밤새 안녕이란 말이 고마운 때입니다.

정자를 찾는 정해진 몇몇의 손님이 있습니다. 느닷없이 쏟아붓는 비를 피해 머리를 들이미는 손님이야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바람에 지나지 않는 걸음입니다. 일정한 시간을 정해두고서 찾아오는 손님 중에 언니, 동생 하며 서로를 반기는 두 여인이 있습니다. 간단한 돗자리와 점심을 챙겨 소풍처럼 나오는 손님입니다. 삶은 달걀 두엇에 따끈한 커피도 보온병에 담아 챙겨 오지요. 엊그제는 봄에 뜯은 쑥으로 만들었다며 쑥떡을 내밀기도 했습니다.

조금 깡마른 할머니가 동생입니다. 키도 훤칠하고 몸집도 좋은 이가 언니가 되겠지요. 정자 바닥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한바탕 사는 얘기를 풀어놓았습니다. 귀를 쫑긋 세울 것도 없습니다. 그냥 사는 이야기입니다. 집안의 대소사에서부터 요즘 유행한다는 핫아이템에 이르기까지 주제도 다양합니다. 정자 난간에 팔을 괴고 앉아 귀동냥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싱겁게 몇 번을 웃었나 모릅니다. 나 사는 이야기 같아서 가슴이 뜨끔할 때도 있고, 어머나 세상에 하며 놀라는 순간도 있지요. 우여곡절에다 굽이굽이 인생길이 황혼으로 내려앉기도 합니다.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가 재밌습니다. 작은 냇가에 앉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는 것만 같습니다. 도란도란 나누는 말은 바람이 되었다가 졸졸졸 냇물로 흐르기도 했지요.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아득한 전설이 되었다가 투닥투닥 내리는 빗줄기도 되었습니다.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아들 둘이 있는데 두 놈 다 장가를 못 갔지 뭐야...."

동생 할머니가 얘기를 하다 말고는 먼 산을 바라보았습니다. 숨 고르기였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이야기를 잇기에 가슴이 아려 멈춘 거라면 그 조그만 몸집이 너무 가냘퍼보일 거 같았습니다. 정말 가녀린 할머니입니다. 작은 몸집이라서 목소리도 산들바람처럼 얌전하기만 합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꽤나 오래전에 위암 수술을 받았다고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암은 전이되지 않아 건강을 되찾았지만 한 채 있던 집을 팔아야만 했다고 하더군요. 그게 못내 쓰라린 모양입니다.

"아, 글쎄 내가 꼴랑 하나 있는 집을 팔아먹었지 뭐유. 고놈의 암 때문에...."

끊어질 듯 이어지는 할머니의 이야기엔 회한이 뚝뚝 묻어있어서 말이 바윗덩이처럼 무거웠습니다. 거기다가 아들 둘이 벌이가 시원치 않은 모양입니다. 한숨을 깊게 쉬었습니다. 노년이 답답합니다. 그러니 좁은 집에 갇혀 하루를 보낸다는 건 옥살이와 다르지도 않을 듯합니다.

도시락에 밥을 푸고 반찬 두엇 조물조물 무치는 건 일종의 해방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야기가 통하는 든든한 언니가 그래서 더 반갑고 기다려지겠다 싶었습니다. 꼬맹이들 손꼽아 기다리는 소풍처럼 가슴에 봄바람 가득 담아가는 외출입니다. 탁 트인 정자로 불어 가는 바람은 시원합니다. 오가는 사람들 꽃처럼 바라보며 나누는 수다는 그래서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씻어내는 단비이겠다 싶었습니다.

연분홍 고운 치맛자락처럼 메꽃이 피었습니다. 촉촉이 내리는 비에 초록은 싱그럽고 발연분홍 꽃잎은 새색시 치맛자락을 닮았습니다. 두 할머니의 청춘도 아마 메꽃처럼 고왔겠지요. 발그레 붉힌 얼굴은 꽃보다도 고왔을 터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세월이 흘렀습니다. 정자에 고인 말들이 수다스러운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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