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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회전 금지

by 이봄


좌회전 금지, 한동안 인터넷 여기저기에 출몰하던 문구를 떠올리게 하는 표지판이다.

"인생 좌절 금지!"

지레 겁을 집어먹고 포기하지 마라. 세상 모든 것에 포기와 좌절은 금지였다. 먹고사는 문제도 그렇고 마음에 담은 여인에게도 그렇다. 청춘의 열정은 때로 무모하리만큼 저돌적으로 뛰어들 필요가 있는 거였다. 여름 한 철 뜨겁게 몰아치는 태양도 때가 지나면 스르르 꼬리를 내리게 마련이었다.

오죽 집어먹을 게 없으면 미리 겁을 집어먹고 똥개처럼 꼬리를 말고 낑낑거릴까. 비렁뱅이의 찬을 먹더라도 황제의 꿈을 꾸어야만 하는 게 청춘이라고 목청을 높이던 문구였다. 귀에 딱쟁이가 앉도록 퍼 나르고 회자되던 문구가 교통표지판 하나로 떠올랐다.

체온만큼 뜨거울 거라고 문자가 날아들었다. 매미가 울었고 햇살은 아침부터 요란을 떨었다. 공원을 한 바퀴 도는 데는 사십여 분이면 충분했다. 무거운 것을 들 일도 없고 힘든 작업을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설렁설렁 바람처럼 휘 한 바퀴 돌면 그만이었는데도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고, 이내 짭조름 흘러내렸다. 시간은 겨우 열 시도 넘기지 못한 아침이었다. 재난 문자는 허투루 날아든 게 아니었다. 모처럼 밥값을 했다. 그렇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흰구름과 파란 하늘이 좋았다. 비도 나쁘지는 않다. 안에서 바라보는 비는 더없이 좋다. 주룩주룩 젖어드는 마음도 좋고 밤이 새도록 그리움에 서성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안에서 밖을 내다볼 때의 얘기다. 밖에서 질적벌적 맞아야 하는 비는 폭염에 비할 바가 없다.

폭염경보에도 불구하고 두 할머니는 반찬 몇 가지와 콩밥을 정성스레 싸고서 소풍길에 나섰다. 반쯤 얼린 물과 따뜻한 커피도 보온병에 담았다. 하늘하늘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입었다. 어제의 궁금함이 오늘의 반가움이 되어 인사를 나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다. 먼저 알아본 사람이 먼저 인사를 했다. 나이가 많든, 적든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그저 목적지만을 바라보고 스쳐갈 때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생태계가 공원엔 존재하고 있었다. 노숙자의 고단함이 햇살처럼 뜨거웠고, 하릴없는 일용직 노동자의 막걸리병이 대낮부터 나뒹굴었다. 그렇지만 지레 겁을 집어먹을 필요는 없다. 오늘 할 수 있는 것 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졸음이 매달린 끝에 손만 뻗으면 닿을 꿈 하나 매달고 살아야만 한다. 내일을 기다리고 아침을 반긴다는 건 복권 한 장 주머니에 넣어두고서 만지작거리는 거였다. 일확천금의 꿈을 말하는 건 아니다. 실현가능한 작은 꿈 하나가 중요하다.

읽다가 만 책 한 권의 끝이 어떤지 궁금해지는 것도 꿈이다. 가을 단풍이 얼마나 붉게 피어날지 궁금한 것도 꿈이라고 우기면 그만이다. 내일의 날씨가 어떤지 궁금해서 기어코 새벽을 봐야만 하는 오기도 어쩌면 오늘을 건너는 삿대일 거였다. 날마다 글 하나를 쓰겠다고 다짐했다. 비가 와도 그렇고 오늘처럼 폭염이 세상을 바짝 굽는다고 해도 글 한 줄에 매달려 꿈을 꾸겠다고 했다. 그늘 좋은 벤치에 엉덩짝을 붙여도 좋고, 정자의 바튼 의자에 앉아도 좋았다. 다짐을 허물자면 입에 담는 모든 말이 핑곗거리가 될 터였지만, 거꾸로 다짐을 단단하게 붙들자면 핑곗거리가 이유가 될 거였다.

"인생 좌절 금지!"

역사의 한 모퉁이를 지키고 있는 좌회전 금지 표지판이 목청 높여 얘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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