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처럼 2

by 이봄


무명천 창백한 얼굴에 몇 번이고 쪽물을 들이고, 흐르는 냇물에 또 몇 번을 헹구어내면 바지랑대 꼭대기에 앉은 하늘이 스며들었다. 말갛게 불어 가는 바람에도 쪽물이 들면 세상 천지간에 온통 쪽빛이 푸르게 넘실거렸다. 빨랫줄 가득 하늘이 내려앉았다. 무명천 바람에 나풀거릴 때 바다가 뭍으로 기어올랐는지도 모른다.

쪽빛 푸른 하늘이 뒷마당 팔랑거리는 바람을 따라 철썩였다. 재만 남긴 푸른 등걸이 스몄다. 낮게 엎드린 쪽풀의 초록이 숨을 죽이고, 항아리 깊은 어둠에서 몇 날 너와 나를 구분 짓지 못하는 엉킴 속에서, 바다를 닮은 파랑과 하늘을 닮은 푸르름이 엉키고 스몄다.

잿빛 하늘에 장대비가 쏟아졌다. 몇 번 쏟아지고 그치기를 반복한 하늘은 결국 쪽빛 얼굴을 내밀고야 만다. 스미고 헹구어내기를 반복하고 말간 바람에 몸을 맡기면 들러붙은 번거로운 것들 하나씩 떨어내고서 먼 옛날 처음이 있던 날의 얼굴을 한다. 땅과 하늘이 서로를 닮아 스미는 거였다. 그 속에 기댄 초록이 어우러지면 가을하늘이 바지랑대 높이 팔랑거렸다. 고추잠자리 꽃처럼 파란 하늘을 유영하고, 지상에 내려앉은 별들이 들꽃으로 피었다. 바람이 불면 그래서 꽃들은 찰랑찰랑 별처럼 흔들렸다.

마음으로 잇닿아 있는 것들은 서로를 닮아갔다. 때로는 소낙비처럼 후닥닥 하나가 됐고, 때로는 거북이의 질주처럼 가늠하기가 어려웠지만, 여름의 끝에 단풍이 물드는 것처럼 소리소문도 없이 결국은 한 모습으로 낯빛을 바꿨다. 마음에 담은 것과 내가 닮는다는 것처럼 멋진 일이 또 있을까? 대지에 흩뿌려진 햇살은 노랗게 바람으로 몰려갔다. 햇살에 매달린 해시계처럼 몸뚱이를 비틀어 종일 바라보다가 해바라기는 노랗게 꽃을 피우고 햇살이 되는 거였다. 바라보고 마음에 담는 거였고 서로에게 스며 물드는 거였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나도 그렇게 스몄으면 좋겠다. 너는 나로 스미고 나는 너로 스며 쪽빛으로 팔랑거렸으면 좋겠다. 잇닿은 마음이 있다면 굳이 그랬으면 하는 마음조차도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보랏빛 노을이 지고 그 속에 스민 세상이 처음부터 보랏빛이었던 것처럼 구분되지 않는 닮음이 좋았다. 종일토록 바라보는 것과 종일토록 떠올리는 것이 있다면 그렇게 스며 하나이고 싶다. 길가에 핀 씀바귀 하얀 꽃도 좋겠고, 개망초 떼 지어 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비 그친 하늘이 여전히 잿빛 구름으로 가득하다. 몇 번의 물들임과 그만큼의 헹굼이 필요할 터였다. 더는 잿물이 나오지 않을 만큼 장대비에 헹구고 바지랑대를 높이 세워야만 한다. 바람은 냇물처럼 흘러가고 꽃잎 몇 개 곱게 치장하면 쪽풀 닮은 하늘이 열릴 터다. 스며 물든다는 건 그래서 아름답다. 서로에게 내어준 어깨는 포근하고 따뜻하다. 말을 더하지 않아도 기대 스며드는 것만으로 미소 짓게 된다. 바라보는 나도 흐뭇하다. 언젠가는 나도 그랬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해서 그렇다. 노을처럼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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