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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봄 Jul 25. 2023

헛물


남자가 눈을 뜬 건 네 시가 못된 새벽이었다. 부스스 눈을 뜨고 일어나 시간을 확인하고는 얼추 일어날 시간이구나 생각했다. 시간을 맞춰놓지 않은 선풍기가 새벽이 깊도록 씩씩 돌아가고 있었다. 열린 창으로는 여전히 어둠이 기웃거리고 있었고 깊은 잠에 빠진 골목은 바람소리조차 없었다. 고요하고 잔뜩 가라앉은 새벽이었다. 때를 모르고 울어대는 매미만 빼면 그랬다.

매미 한 마리가 잔뜩 갈라진 목청으로 꺼이꺼이 울었다. 분명 암컷을 유혹하기 위한 외침이었지만 목소리는 갈라져 쇳소리가 났다. 지나친 상상일지도 모르겠으나 거나하게 취한 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 남자였다. 바람도 없는 골목에 매미소리가 휘정거렸다.

"보셔요? 보시어요? 저 좀 보셔요?"

간절하게 손짓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젠장! 내가 어때서? 목이 쉬도록 불러봤자 콧방귀도 뀌지를 않네!"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어디 하나 걸리기만 해 봐라! 드잡이라도 할 기세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보안등 불빛에 서너 평 남짓 어둠을 밀쳐내고 있을 뿐, 사위는 잔뜩 어둠에 잠긴 시간이었다.

"투명하고 단단한 날개는 햇살아래 어찌나 영롱한지 모르겠고, 몸을 감싼 껍데기는 당장이라도 전장에 나간다고 해도 부족할 것 없는 갑주인데 말이야!"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고 날개를 파닥이며 매미가 신세타령을 했다. 그의 말마따나 날개는 단단하게 반짝였고 몸을 감싼 갑옷은 검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거기다가 이마 양 쪽으로 불거진 두 겹눈은 진주처럼 탐나게 생겼는데 왜 아무도 눈길조차 주지 않느냐 말이야!"

불콰하게 취기가 오른 매미의 삿대질이 골목을 깨우고 있었다. 애먼 사내만 덩달아 새벽에 앉아 주정을 받아주는 꼴이었다.

쓰르락 싸르락 베짱이가 울면 동네 처녀들은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당산나무 그늘로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정신이 쏙 빠진 처자는 턱을 괴고 앉아 밥이 끓는지 마는지 안중에도 없이 까마득히 지워버렸다. 베짱이가 노래를 부르다가 침이라도 삼키면 지켜보고 있던 처녀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꼴깍 침을 삼켰다.

건너편 느티나무 그늘에 앉았던 귀뚜라미가 귀뚜루 귀뚤 노래를 시작하면 또 그만큼의 처녀들이 우르르 몰려가 자리를 잡았다. 베짱이와 귀뚜라미가 나타난 저녁이면 애꿎은 동네 개들이 배를 곯고 컹컹 울었다. 밥 짓는 연기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고, 당산나무와 느티나무 그늘에선 까르르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매미가 사는 동네였다. 우락부락 한 덩치 하는 사내놈들은 명함 한 장을 제대로 들이밀지 못했다. 잔뜩 주눅이 들었던지 가뜩이나 칠판을 긁는 쇳소리가 몇 갈래로 찢어지고는 했다.

"단지 조금 아쉽다고 한다면 고놈의 목소리가 돼지 멱따는 소리라서 쪼끔 민망하기는 하다만 그거야 뭐...."

매미란 놈이 말을 잇다 말고 꼬리를 말았다. 그거였다. 아주 조금.... 쪼끔 뭣한 그게 아니고 아주 대단한 퇴짜의 사유를 가지고 있었던 거였다. 초승달이 몸집을 키워 보름달이 되도록 운다고 해도 찢어진 목청만 더욱 아플 터였다. 취해 흔들리는 울음은 새벽이면 더욱 쇳소리로 귀를 긁을 게 뻔했다. 안타깝고 지랄 맞은 팔자지만 어쩔 수도 없었다. 자포자기 체념이란 말이 절대적으로 나쁜 것만도 아니었다. 밍숭밍숭 백 날을 헛물만 들이키느니 그럴싸하게 자신을 포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나는 애초부터 비혼주의자야! 처음부터 암컷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것엔 뜻이 없었거든. 하하하"

호탕하게 웃으면서 가는 거지 뭐. 인생이란 게 뭐 별거 있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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