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by 이봄


전철에서 그녀를 만났다. 때 늦은 출근길이었지만 지하철에 빈자리는 없었다. 다만, 이리 밀리고 저리 치이는 복잡함은 없어 다행이다 생각하며 오른 전철에 그녀가 타고 있었다.

그녀는 150cm를 조금 상회하는 아담한 키와 허리가 잘록한 가녀린 몸을 하고 있었고, 어깨를 넘는 찰랑이는 머리카락은 윤기가 흐르고, 기분 좋은 샴푸향이 솔솔 풍기고 있었다. 무슨 향일까 코라도 가까이 가져다 맡고 싶었다. 훅~하고 폐부를 파고드는 그녀의 향기는 먼 초원에서 불어오는 초록의 싱그러움이었다.

그녀는 손에 핸드폰 하나에 작은 부채를 하나 들고 있었다. 댓살이 작고 귀여운 조그만 합죽선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얀 한지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군더더기를 싫어하는 담백함이 그녀의 성격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치렁치렁 요란한 꾸밈을 싫어한다'는 생각을 갑작스럽게 떠올렸다. 조그만 무엇 하나라도 공통점을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건 그만큼 심리적으로 가까워졌다는 얘기니까.

그녀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하늘거리는 원피스는 꽃무늬로 화려했고, 속이 다 비칠 듯 한 시폰(?) 재질의 원피스여서 무척이나 여성스럽다고 생각했다. 거기에다 꽃분홍 리본으로 한 줌 가냘픈 허리에 포인트를 주었다. 남자라면 누구도 허리에 감긴 리본을 지나칠 수는 없었다. 힐끔힐끔 눈을 돌려 시선에 담을 수밖에 없는 포인트였다. 천상 여인이다. 잘 정리된 손톱은 에나멜 마감이 반짝였고, 희고 고운 손가락은 꽃무늬 원피스를 닮아 예뻤다. 한여름에 마시는 냉수처럼 시원하고 청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곁으로 다가가는 몇 걸음 동안 파악한 대충의 그녀의 겉모습이다. 그랬다. 나도 어차피 사내의 본성에 충실한 그래서 예쁜 여인을 보면 눈이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남자다. 그렇다고 기분 나쁜 부라림으로 날 보지는 마시라. 음흉한 훑어봄이 아니다. 그저 슬쩍 내 눈에 투영된 그녀가 이런저런 정보를 쏟아내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또 그렇게 들어온 정보를 정신없이 정리하고 판단했다. 줄을 세우고 나만의 언어로 상상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녀는 친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연신 돌아가는 선풍기와 에어컨 바람만으론 객차 내의 사람들이 뿜어내는 열기를 감당하지 못했다. 후덥지근 열차는 더웠다. 그녀는 부채질로 바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열차에 올라 그녀를 발견하고는 빠르게 요목조목 뜯어본 순간부터 부채를 연신 부쳐대고 있었다. 부채가 만든 바람은 생각보다 시원했다. 내게 들려져 있는 부채는 제법 그 크기가 커서 바람은 나를 벗어나 옆으로 옆으로 날아갔고, 그녀의 향기 나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맑은 바람에 살랑이는 버들가지처럼 예뻤다.

그녀는 핸드폰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엔 부채질도 그만두었다. 날씨가 덥다고 했고,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부채질을 멈추지 않았고, 전철도 쉼 없이 역마다 사람을 토해내고 실었다. 수유에서 동대문, 동대문에서 역사문화공원까지 내달렸다. 내려야 할 역이 가까워진 만큼 그녀는 어느새 손과 손이 맞닿을 만큼 내 곁에 다가와 있었다.

분명 전철에 승차했을 때 그녀와 난 한 사람 정도의 공간을 두고 서 있었는 데, 내릴 때가 다 되어서 그녀는 내 곁에 와 있었고, 가끔 전철이 흔들릴 때마다 손이 스치기도 했다. 괜한 오해를 부르고 싶지 않았던 터라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복잡하지 않은 전철이라면 적당한 거리는 필수였다. 바람이다. 준수한 외모가 있어서 그녀를 가까이 유혹할 일 없거니와 사람에 등 떠밀려 곁에 선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그녀와 손등이 스치도록 가깝게 선 이유는 하나밖에는 없었다. 그저 연신 부쳐대던 내 부채가 그녀를 내게로 이끌었을 터였다. 시원한 바람이 알게 모르게 그녀를 게걸음으로 옮겨오게 했다. 푹푹 찌는 더위에 시원한 바람만큼 큰 유혹도 없었겠지. 조금씩 조금씩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미미한 움직임으로...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부채질을 멈췄었다. 미아역인가? 미아삼거리역이었던가는 잘 모르겠다만, 그녀는 그때부터 게걸음으로 내게 다가온 게다. 순전히 시원한 바람에 이끌려 내게로 왔다. 평소였다면 아저씨 곁에 다가설 일 없는 그녀가.

그녀가 내린다. 실컷 바람을 사랑했던 그녀는 바람처럼 사라져 간다. 몰려가는 인파에 묻혀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하얀 그녀의 고운 손을 들어 작별을 고했다. 그녀가 밀리는 인파 속에서 머리를 쓸어 올렸을 때 나는 그게 영원한 이별임을 직감했다. 그녀의 손가락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치기 어린 커플링이 아니다. 차갑게 반짝이는 백금 링에는 또르륵 눈물방울 하나 매달려 웃고 있었다.

"언제고 꼭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허망한 기대 따위는 애초에 물 건너갔다.


갑자기 손목이 아프고 어깨가 뻐근하다. 아, 연신 시원한 바람이 불었는데 어찌 이마엔 땀방울이 맺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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